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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린 쇼핑몰 근처  - 11월 24일 월 9:48am


저스틴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역시 성빈이나 혜원과 만나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혜원의 모바일 번호는 알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 혜원의 모바일의 위치가 마지막으로 GPS에 잡힌 것이 뉴린이라서 아침에 뉴린까지 오긴 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차 앞 유리를 보며 한 숨을 쉬는 순간 그 차가 미친듯이 자신의 눈 앞을 지나갔다.
그 차였다. 공항에서 본 검은색 테리토리. 그리고 찰나였지만 그 피 냄새를 풍기는 남자의 눈이 부신 짧은 금발이 보였다.

저스틴은 노트북을 조수석으로 집어 던지고 시동은 건 후 도로로 나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맥도날드의 주차장의 일방통행을 무시하며 역주행하여 주차장을 나와 차도로 접어들었다. 3999cc V8 엔진을 얹은 홀덴사의 클럽 스포트는 역시 힘이 넘쳤다. 월요일 오전이라 차가 좀 있는 편이었지만, 런던의 지옥 같은 정체에 비하면 이건 독일의 아우토반이었다.

70미터쯤 앞에서는 가던 검은색 테리토리가 막 사거리로 진입하는 순간 사거리의 신호등은 주황색을 거쳐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저스틴이 사거리에 도착할때는 이미 자신의 눈 앞에서 가로로 차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아우토반 같던 그 길이 정체로 유명한 뉴욕보다도 한심해 보였다. 어차피 2~3분은 기다려야 할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혜원의 모바일로 전화를 했다. 제발 받아라. 제발 죽지마라. 띠디디디. 신호가 간다. 정확하게는 신호가 한번이 가기도 전에 전화기 저 편에서 네이티브로 보기엔 어렵지만, 어릴 때 이민 왔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만큼의 유창한 영어 엑센의 헬로우가 들려왔다.

혜원이었다. 제길. 뭐라고 해야하지. 내가 MI6라고 하면 믿을까? 피 냄새를 풍기는 저승사자가 당신에게서 피를 짜내기 위해 가고 있다고 말해줘야 하나. 일단 도망가라고 말해줄까?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있는 중에 혜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의 남자친구가 당신께서 어제 검은 정장의 사내들을 멈추게 만든 분인지를 묻습니다.
그렇소. 난 저스틴이라고 하네. 지금 당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네. 일단 나를 만나서 자세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말을 짤라먹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온다.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런 애송이들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다닐수는 없다.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보기관중의 하나며, MI6 작전국 Global Issue 팀의 리더아닌가.

“다시 묻겠습니다. 어디 소속입니까?”
“지금은 말해줄 수가 없네. 일단 만나면 내가..”
“그렇다면 저희도 할말이 없습니다”
찰칵.


이 놈들은 분명 여기가 자기네 안방이었다. 경찰도 신경 안쓰고 미친듯이 차를 몰고, 모텔 입구와 인도에 걸쳐 차를 주차한걸 보니, 교통신호고 법이고 다 무시하는게, 분명 여긴 저들의 안방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뉴질랜드 정부 관련 혹은 그에 필하는 백그라운드를 가진 놈들일것이라.

저스틴은 모텔 멀리 차를 대고 보니 그들도 이 깜찍한 동양 커플을 놓친듯 하다. 사거리에서 혜원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후, 파란 신호가 켜진지가 채 2분도 가기 전에 저 멀리 모텔 앞에 3대의 검은색 테리토리가 있는 것이 보여 저스틴은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금발의 피 냄새 사내와 몇 명의 검은 정장 사내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놓친듯 하다. 그럼 어디서 나의 전화를 받은 것일까? 이미 모텔을 빠져 나온 뒤 였을 것이다. 아직 이 주변에 있을텐데. 전화를 하지만 혜원의 전화는 꺼져있다. 애가 탔다. 저 평범한 애들을 살리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피터 백작과 관계 있는지 아닌지가 궁금했다. 아니라면 영국으로 돌아가는 첫 비행기를 잡아 타고 바로 가 버리고 싶었다. 근데 확인이 안된다.

이 평범한 애들은 MI6의 나 뿐 아니라 저 저승사자들까지 따돌리고 있다. 기가 막혔다. 이렇게 휘둘려야 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송이 같지 않은 애송이들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게 하는건지. MI6로 전화를 해서 다시 혜원의 모바일 위치를 추적하라고 말을 하기 위해 전화기를 잡는 순간이었다. 차 뒷문이 열리더니 혜원이 탔다.

성빈과 혜원은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입국 기록을 확인하여 자신의 신분을 확보했을거라는 것과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혜원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혜원의 신분을 확보했다면 사무실로 전화를 하거나 도청을 할테고 그렇다면 모텔로 쳐 들어오는 것은 곧 이리라. 그들은 오클랜드 시내 방향에서 올 확률이 높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뉴린을 지나쳐 오겠지.

그리고 어제 우리를 도와준 사내가 알마니 검은 정장과 한 패가 아니라면 알마니 검은 정장이 모텔을 급습하는 동안 모텔에 못 미쳐 차를 세우고 상황을 엿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는다면 알마니 정장을 피하는 것과 그 사내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성빈의 추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혜원은 차 문을 닫자 이내 그 유창한 영어로 일단 출발하자고 한다. 기가 막혔다. 또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룸미러를 통해 뒷자석에 앉은 혜원을 본다. 예쁜 얼굴이 애써 침착한 척을 하고 있다. 아마도 다리는 한 겨울의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으리라.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게 아쉬울 뿐이다.

주의를 끌지 않게 차를 출발해 주세요” 다시 말한다. 저스틴은 일단 출발을 한다. 10초쯤 지나자 아직도 모텔 앞에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검은 정장의 놈들이 보인다. 그 놈들을 지나쳐 차의 속도가 40Km쯤 되자 혜원이 조금 더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앞으로 우리는 10분 정도 대화를 하게 될 겁니다.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 그 다음에 또 좌회전. 그런식으로 사거리가 나올 때마다 좌회전을 해 주세요. 즉, 우리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10분간 대화를 할 겁니다. 차가 예정대로 계속 좌회전을 하지 않거나 , 제가 남자친구에게 연락하기로 한 시간에 연락을 하지 않으면 제 남자친구는 바로 제가 납치되었다는 전화를 경찰에 할 것이며, 홀덴사의 검은색 클럽 스포트, 차량번호 CAK229 차량 번호를 경찰에 알려줄겁니다. 뉴린의 경찰서는 여기서 2분 거리입니다. 3대의 경찰차가 이 차를 세우고 모든걸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시라고 믿습니다. 자~ 대화를 해보죠. 당신은 누굽니까?” 그 순간 저스틴은 깨달았다.

그 때 혜원의 전화가 켜져 있던 것은 의도적이었으며, 자신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 어쩌면 그들은 큰 위험을 감수했던 것이다. 모바일이 켜지면 위치가 추적당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듯 했다. 성빈이 기무사에 근무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내용이었다. 자신이 목숨이 위험하다고 알려주지 않았어도 이 애송이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스틴은 이미 자신이 이들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스틴 트로이, 영국 정보부 MI6입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첫번째 사거리가 나오자 저스틴은 묻지도 않고 얌전히 좌회전을 했다.
“우리를 쫒고 있는 저 검은색 정장들이 당신과 일행이 아닌 것은 압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나도 정말 모르네. 어떤 조직의 실행부대거나 이 나라 정보부일 것이라고 추측하네. 근데 성빈이란 자네 남자친구는 도대체 어쩌다가 저런 놈들의 추적을 받고 있는건가?”
라고 역습을 가하며 저스틴을 룸미러로 혜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실행부대라. 그 표현이 좋겠군요. 우리는 어떤 대규모 송금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 주식 분석에 대한 자료와 정치에 대한 자료도 가지고 있습니다. 몇가지 가설이 있지만 명확하게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저 실행부대가 그 메모리칩을 원한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차는 아직까지 혜원의 지시대로 계속 좌회전을 하고 있지만, 저스틴은 이제 분위기를 자기가 주도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자료를 넘기게. 내가 자네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그 자료가 당신에게 유용할지 안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저희의 안전을 보장한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만약 당신에게 유용한 자료가 아니라면 당신이 우리가 안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까요? 전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군요. 이제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
제길! 산전수전 다 겪고 MI6 에 14년을 근무한 내가 이렇게 휘둘리게 될 줄이야. 곧 자신이 차를 세우고 있던 맥도날드가 보였다.

“맥도날드를 지나 바로 우회전을 해주세요. 당신도 말레이시아에서 성빈을 따라 입국했습니까?”
“아니네. 난 영국에서 입국했네.”
“입국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스틴은 순간 고민이 됐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계 최대의 감청 시스템 애셜론이 평소 감시중이던 피터 백작의 전화를 도청했다고 순순히 자백을 해야하나. 그럴 순 없지.
“영국 정보부의 감시를 받던 한 저명인사가 받은 전화 때문이었네. 그 전화는 태국의 푸켓에서 걸려왔지. 그 정보를 따라 뉴질랜드로 입국했네”

차가 우회전을 하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스틴은 느꼈다. 우회전을 하면 곧 혜원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이 깜찍한 애송이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영국 주소, 영국 전화번호가 찍혀있는 MI6의 명함이었다. 신호가 바뀌어 차를 출발시키며 말 없이 명함을 뒤로 넘겼다. 우회전을 하자 차는 일차선으로 진입을 하였다.


도로의 좌측에 있는 뉴린 쇼핑몰에서는 인파가 몰려 나오고 있고, 우측에는 오클랜드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버스터미널인 뉴린 버스 터미날, 정면에는 뉴린 기차역. 복잡했다. 그리고 일차선인 차도는 좁았다. 차를 유턴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길을 다 지나고 나면 혜원이 쇼핑몰로 들어갔는지, 버스를 탔는지, 기차를 탔는지 모를 상황이었다. 성빈과 혜원의 상황 장악력은 탁월했다.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처음에 계속 좌회전을 시킨것도 쇼였다. 상황에 대한 제약을 걸지 않은 상태에서 10분간만 대화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 저스틴도 일단은 차를 한적한 곳으로 몰았을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혜원은 차를 계속 좌회전시켜 누군가가 이 차를 지켜보고 있다는 인식을 저스틴에게 심어줬으며, 이를 통해 안전하게 대화를 하고 원하는 장소(물론 이 복잡한 장소)에 내릴 것이다. 아마 그 10분 동안 성빈은 이동하여 이 근처 어디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한마디의 말로 확실하게 시간을 번 것이다.


역시 차는 얼마 가지 못해 복잡한 길로 인해 잠시 멈췄고, 뒷문이 열렸다. 혜원은 차에서 완전히 내린 후 몸을 숙여 저스틴을 보고 말했다.
“지난 10월, 영국내 28개의 은행에서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대규모 송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정치판 예상분석과 베로 보험회사 주식 매도매수 계획서가 저희에게 있습니다. 숙제를 드리죠. 거기에서 연관성을 찾아보세요. 저희가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언제일지는 모르겠군요. 보시다시피 계속 쫓기는 입장이라” 그리고는 차 문을 닫았다. 저스틴은 재빨리 그 내용들을 머리속으로 외웠다.


앞차는 이동을 했는데도, 저스틴의 차가 앞으로 가지 않자 뒤에서 빨리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저스틴이 차를 출발하며 왼쪽을 돌아보니 성빈과 혜원이 쇼핑몰 안에서 어깨동무를 하고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게 아닌가. 그 둘은 마치, ‘이제 숙제를 내 줬으니 집으로 가서 열심히 숙제를 한 후 내일 제 시간에 다 한 숙제를 꼭 챙겨서 등교를 하려무나’라고 하는 선생님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또 기가 막혔다. 저 둘을 MI6로 스카우트라도 하고 싶어졌다. 스카우트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백업팀이 필요했다. 혼자 활동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더군다나 여기는 내 안방인 영국도 아니지 않는가.


저스틴은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웃기다고 피식 웃으며 MI6의 케이트에게 전화를 했다.
“애쉴런을 풀가동하여 피터 백작과 뉴질랜드의 알렉스 덴버 주변을 모니터링할 것, 지난 10월 영국 내 은행들에서 버진 아일랜드로 송금된 내역을 파악할 것. 뉴질랜드의 베로 보험 회사의 주가를 분석하고, 이와 연계되는 영국 내 보험회사가 있는지 확인할 것. 특히 보험 회사와 피터 백작의 연계성을 집중 추적할 것. 뉴질랜드 Works 당의 차기 대표 알렉스에 대해 PBI 레벨 3로 집중 조사할 것. 그리고 자료분석팀, 감청팀, 경호팀, 작전지원팀을 지금 당장 조직하여 MI6 전용기 편으로 뉴질랜드로 파견할 것.“

정확하게는 모르나, 피터 백작과 알렉스 덴버 사이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 듯 하다. 성빈은 말레이시아에서 우연히 정보를 입수하게 되어 쫓기는 중인 것이다. 이제 영국의 MI6에서 이 자료들을 조사하면 뭔가가 드러날 것이다. 저스틴은 더 이상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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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클랜드 뉴린 맥도날드 - 11월 24일. 월 9:40am


저스틴은 빈센트가 있는 뉴린 쇼핑몰 주차장 길 건너편에 있는 맥도날드 주차장에 어제 공항에서 렌트한 홀덴 클럽 스포트를 주차한 후, 노트북으로 오늘 새벽 MI6로부터 도착한 혜원과 성빈의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혜원에겐 정말 특이한 사항이 하나도 없었다. 12년전 이민와서 오클랜드 대학에서 파이낸스를 전공하고, 3년전 BNZ에 입사하여 1년 전부터 위기관리팀에서 분석가로 일하고 있었다.

성빈은 대학 졸업후, 입대를 한다. 자신도 알고 있는 대한민국 군 정보기관 기무사령부에서 2년 반을 근무하고 제대후, 3년전 뉴질랜드에 영어 연수를 왔다. 아마도 둘은 이 기간에 만났을 거라고 저스틴은 생각했다. 기무사에 근무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 공항과 시내에서 무슨 일로 피 냄새를 풍기는 남자에게 쫓기고 있는 것일까?


성빈과 피 냄새의 사내는 모두 말레이시아에서 같은 날 뉴질랜드로 입국했다. 이 점을 생각하면 뭔가 있을 듯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받은 정기 보고에 말레이시아의 새 총리 취임식 말고는 특이 사항이 없었다. 말레이시아의 새 총리, 피터 백작을 감시하고 있는 MI5, 오늘 새벽 조사해 본 바로는 뉴질랜드의 집권당 Works의 차기 대표 알렉스 덴버, 피 냄새를 풍기는 사내. 그리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성빈이라는 한국 젊은이. 모두가 말레이시아에 있었다.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뭔가 있는데 알 수가 없다. 그 때 노트북에 긴급을 알리는 내용이 떴다.

“KFJIPOQJN VCNPADNA JNQNPV JBDJPEQB JDPAI” 알 수 없는 문구가 떴지만, 암호문을 해석하는 디코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암호를 입력하니, “지난 21일 금요일 피터 백작이 말레이시아에서 극비리에 태국의 푸켓에 갔던 것이 확인됨. 만난 사람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특이하게도 뉴질랜드 Works당의 차기 대표 알렉스 덴버 또한 푸켓을 방문한 것이 확인 됨. 단정할 순 없으나 둘 사이에 비밀 회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MI5의 추적을 받고 있는 피터가 뉴질랜드 집권당 차기 대표를 만났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영국의 유명 귀족이 타 국가의 정치인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니. 그러나 너무 극비리에 만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욱이 같이 말레이시아에 있었는데, 태국까지 이동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뭔가 있다.


그리고 같은 말레이시아에서 출발한 평범한 동양인을 쫓는 피 냄새를 풍기는 남자. 이 평범한 성빈이란 남자와 피 냄새를 풍기는 남자 간에 뭔가 있다. 이 남자가 정치인 뒤에서 궂은 일을 하는 남자라면 이 남자는 알렉스 덴버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그건 피터 백작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날 밤 푸켓에서는 뭔가 있었고, 그것에 성빈이라는 남자가 우연히 말려들었을 것이다. 중요 참고인이다. 성빈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질 것이고 무엇보다 이 평범한 남자, 성빈은 앞으로 12시간 이내에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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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뉴린 쇼핑몰 - 11월 24일. 월 9:40am


빈센트와 그의 든든한 “지원팀”은 뉴린 쇼핑몰의 야외 주차장에 3대의 검은색 테리토리를 세워 놓고 있었다. 어제 그 동양 커플이 탄 버스는 여기 뉴린 쇼핑몰 맞은편의 버스 터미널을 지나 핸더슨까지 가는 버스였다. 뉴질랜드는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버스의 정류장이 모두 다르기에, 정류장만으로도 동양 커플의 방향은 잡은 것이다. 그들이 서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 것이라면, 여러 버스가 교차하는 뉴린이 그들을 찾아낼 확률이 가장 높다.


빈센트는 주차장에 차 안에 있는 2명의 검은 정장 남자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사실 거의 의미는 없었다. 성빈이 자신의 모바일을 켜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그들을 찾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제 함께 도망치던 여자가 누군지 알아보라고 밤새 추격팀으로 구성된 자신 이외의 11명의 남자들을 달달 볶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

머리를 굴린다. 그 여자는 누굴까. 성빈은 이 나라에 2년을 지냈다.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 여자가 누군지 알 수는 없다. 여긴 유학생과 관광객이 넘쳐나는 뉴질랜드의 대도시 오클랜드 아닌가. 인구 백 만명의 도시 속에서 그 남자를 찾을 방법은 없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찾고야 말겠다.

그 여자의 흔적만이라도 찾으면 , 이름 석자만이라도 알아 낼 수 있다면, 2시간 내로 돌아가신 증조 할아버지의 숨겨진 여자까지도 밝혀낼 자신이 있는데… 어쟀든 강성빈의 신원은 확보했다. 그 놈의 지난 2년 간의 생활을 샅샅이 뒤지면 여자와의 연결 고리가 나오겠지.

여기 나와있는 인원을 제외하고 힐튼 호텔의 추격 본부에서 계속 조사중이니 곧 소식이 있을 것이다. 더워지는 땡볕이 더더욱 짜증나게 한다. 힐튼호텔의 정보수집팀의 앤디에게 전화가 온 것은 그 때였다. 여자를 찾은 것이다!

 

성빈은 3년전 BNZ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후,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계속적으로 이 은행을 사용했다. 계좌 개설 신청서를 접수한 것은 당시 BNZ 은행 한국인 지점에 근무하던 이혜원이라는 여성이었다. 한인 지점에 근무했으니, 수백명에게 계좌를 개설해 주는 것은 특별한 사항이 아니었는데, 앤디가 주목한 것은 성빈이 계좌 개설 신청서의 긴급 연락처란에 이혜원을 적은 것이다.

보통 가까운 친구나 가족을 적는데, 당시 뉴질랜드에 가족 하나 없고, 이혜원과 막 연애를 시작한 성빈이 이혜원을 적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앤디가 이렇게 이혜원의 이름에 주목하자 다음은 너무 쉬웠다.


이민성 자료와 오클랜드 대학 학적부에서 혜원을 찾아냈고, 파이낸스과 동아리 MT 사진에서 혜원의 사진을 입수하니 어제 성빈과 함께 도망친 여자는 혜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혜원의 모바일은 꺼져있다. 앤디는 태연히 혜원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혜원을 바꿔달라고 부탁하자, 존은 친절하게도 그녀가 오늘 병가를 냈다고 알려줬다. 추적팀은 NZSIS의 서버를 경유하여 전화국 서버에 접속하여 교환기를 해킹했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전화 발신지를 추적하니, 현재 빈센트가 있는 곳에서 겨우 5분 거리에 있는 모텔이었다. 모텔에서의 마지막 통화는 한국으로 30분 전이다. 빈센트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폴에게 엔진이 폭발할 정도로 달리라고 얘기를 하고 뒷자리의 푹신한 가죽 시트속으로 몸을 묻었다. 운이 좋으면 가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빈센트는 이제부터는 운이 좀 따라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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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린의 블루버드 모텔  - 11월 24일. 월 9:10am


어차피 숫자 놀이는 혜원의 전문 분야가 아닌가. 성빈은 그것은 혜원에게 맡겨 놓고 다시 그 알마니 정장 남자를 생각했다. 쿠알라 룸푸르에서는 공격을 당했고, 어제 비아덕트에서는 소중한 연인과의 저녁 시간을 강탈당했다. 두 정당의 대표인 알렉스나 마크 셀린과는 무슨 관계란 말인가?  송금확인서에 있는 수천의 이름을 혜원을 통해 조사해 볼 순 있겠지만, 별 의미는 없어보인다.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이 정도의 규모라면 모두 정상적인 신분은 아니라고 보인다. 주식 매수/매도 계획서에도 여러 파이낸스 관련 회사들이 있지만 특별히 누굴 끄집어 내긴 어렵다.  특별한 누군가가 그 속에 묻혀 있을 수도 있지만, 찾아내기가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 분명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뭔지 전혀 모르겠다.

 

어쨌든 돌파구는 필요했다. 일단 그 징그러운 알마니 정장부터 시작하자. 그 남자와 함께 떠 오른 남자는 어제 처음 본 또 한명의 사내였다. 그와 알마니 정장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걸로 보아 알마니의 일행은 아닌듯 하다. 나의 적의 적이면 내게는 친구가 되나?

오히려 그는 횡단보도에서 적극적으로 날 도와준 것 같다. 알마니 정장은 양복 안쪽에 , 그 남자는 허리 뒷춤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둘 다 총을 잡고 있었던걸까? 뉴질랜드에 2년을 있었지만, 총을 본 적은 한번도 없다. 여긴 미국이 아니다. 그렇지만 성빈은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대한민국 기무사령부에서 2년 반을 근무하지 않았나. 지겹도록 사격 훈련을 받은 터였다. 양복 안쪽으로 손을 넣을때는 총집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고, 허리 뒷춤에 손을 찔러 넣은 것은 총집 없이 총을 감추기 위해 허리 뒷춤에 넣었다는 것이다. 간간히 오클랜드 남쪽에서 마오리들이 총을 들고 강도짓을 하긴 하지만, 벌건 대낮에 오클랜드 한 복판에서 총을 꺼내들 인간은 없다.

경찰도 총을 지니지 않고 다니는 나라에서. 역시 최고급 용병이나 국제적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테러리스트, 혹은 어느 나라일지는 모르겠지만, 정보부쪽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가려내는 법이 있다. 찾을 수 있다. 날 쫓고 있는게 누군지 찾을 수 있다.

 

성빈은 모텔의 전화기를 이용해 한국의 국정원에 근무하는 최선배의 모바일로 전화를 했다. 뉴질랜드가 아침 9시니 한국은 새벽 5시일테지만,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최선배와는 성빈이 기무사에 있을 때, 보안 교육을 받을 때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왔다. 8년이나 선배지만, 친구 같은 그였다. 그에게 부탁을 해 볼 생각이었다. 들어주지 않으면 떼라도 써야했다.

어제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의 승객 리스트를 구해달라고 했다. 아무리 친한 너라도 이런건 어려운거 알잖아 라고 잠결에 말하고 있는 선배에게 국제적으로 수배중인 초특급 테러리스트, 혹은 가장 비싼 가격으로만 일을 하는 고급 용병, 혹은 어느 나라일지 모르는 정보부가 있는지만 확인해달라고 했다.


"형, 내가 지금 10년전에 내 돈 떼어먹은 사람 찾을려고 하는게 아니잖아. 형. 좀 도와줘." 라며 밀어 붙이자, 최선배는 알았다고 한다. 아마 졸립지 않았으면 끝가지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그 김에 송금확인 내역서에서 한국이름을 몇몇 뽑아서 이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뉴질랜드에 있던 때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선배가 잠결에 제대로 받아 적었는지 걱정됐지만, 국정원에 10년을 근무한 나름 베테랑이다. 믿어볼만 했다. 연락을 받을 수 없으니, 몇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 반격을 할 차례였다.

성빈은 노트북에 인터넷을 연결한 후, SD 메모리 안에 있던 자료를 압축해서 sungvin_specialcaseonly@gmail.com 으로 전송했다. 이제 그 Gmail은 자동으로 수신된 메일을 야후로, 야후 메일은 말레이시아의 JobsDB.com 메일로, 그런식으로 미국의 mail.com 과 live.com, 중국의 Xina.com, 다시 미국의 AOL 메일 계정을 거쳐 자신의 숨겨진 메일 계정인 Gmail 계정으로 다시 전송될 터였다.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혜원의 도움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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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버진아일랜드-몰디브-뉴질랜드  - 10월

송금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전역의 28개 은행에서 송금된 자금들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BVI)의 한 은행으로 송금되었다. 뉴욕과 파마나 운하의 중간 지점으로 대서양, 카리브해와 만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버진 아일랜드는 동부 36개의 섬과 서부 4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부의 36개 섬은 콜럼버스가 2차 항해인 1493년에 발견하여 1666년부터 영국령이 되었다. 서부의 40여개 섬은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미국이 1917년에 덴마크로부터 사들였다. 영국령이던 미국령이던 중요한 것은 이 버진 아일랜드가 케이만군도, 세인트루시아 등과 마찬가지로 법인세 0%로 유명한 조세 탈피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처음 영국의 28개 은행 지점에서 송금이 시작된 자금들은 버진 아일랜드의 한 은행에서 만나 하나로 합쳐진  뒤, 4개 은행을 전전하다 근처의 몰디브로 넘어가 2군데의 은행을 더 경유한 후 , 뉴질랜드 ASB 은행, BNZ 은행, PSIS 은행, Kiwi 은행 4군데로 나눠져 있는 수천개의 계좌로 입금되었다. 송금 확인서들을 시간순으로 추려내는데만 혜원과 함께 1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의 양이었다. 수천개의 구좌는 모두 개인 구좌였다. 단 하나도 회사나 법인 명의는 없었다.


혜원이 BNZ 은행의 위기관리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은 성빈에게 최근 며칠간 얼마 안되는 행운 중의 하나였다. 아직 은행이 문을 열기 전이었지만, 혜원이 근무하는 부서는 언제나 상주하는 직원이 있었다. 혜원은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병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존에게 송금확인서에서 몇 개의 계좌번호를 불러주고 조회를 부탁했다. 불러준 계좌들이 개설된 시점은 몇 년 전부터 몇 주 전까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모두 같은날 인터넷 뱅킹이 개설되었다. 뭔가 있었다.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순간 혜원은 고민을 했다. 계좌 개설일은 제각각인데, 모든 계좌가 같은 날 인터넷 뱅킹을 신청했다? 누군가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것임은 확실하다.

문제는 누가 했냐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개설된 전화번호들은 모두 가짜일 것이고, 주소는 또한 뉴질랜드 전역에 흩어져 있다. 애초에 뉴질랜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2개의 사진이 첨부된 아이디가 필요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많은 계좌를 관.리. 할 수 있단 말인가. 계좌 주인의 이름의 1/3은 마오리였고, 2/3은 한국인 혹은 중국인, 간혹 일본인들도 있었다. 왜 일반적인 뉴질랜드의 영어 이름은 없을까? 한국인, 중국인이라면 대부분이 혜원과 같은 이민자이거나 유학생이거나 관광객일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혜원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렇다. 그것이었다.


뉴질랜드의 은행은 계좌를 개설하고 계정을 닫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계좌들의 Overdue(마이너스금액)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혜원 본인도 위기관리 팀에 있으면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수 차례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 휴면 계좌들을 이용한 것이다. 그 계좌들을 수 천개 확보한 후 영국에서 송금된 돈을 지구를 한 반퀴 반을 돌려 수 천개의 계좌로 나눠 받은 것이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인출? 그건 아닌 것 같다. 저 정도의 금액을 인출하려면 그냥 비행기를 타고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날아가 원하는 구좌로 송금하거나 현찰로 인출해버리면 된다.


왜 저리 힘든 방법을 통해 뉴질랜드로 송금했을까? 그것과 총선 정당 지지도 분석은 무슨 관계일까? 또 베로 보험회사의 주가 분석은 왜 했을까? 베로 보험회사의 주식 매도/매수 계획서가 있는 걸로 봐서, 이 자금을 통해 베로 보험 회사의 주가를 조작하려는걸까? 누가? 혜원은 성빈에게 뉴질랜드의 은행 업무와 송금의 흐름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위기를 헤치고 나갈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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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린의 블루버드 모텔 - 11월 24일. 월 7:40am

성빈과 혜원은 이제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언제라도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언제 놈들이 들이 닥칠지 모르니. 지난 이틀간 일어난 일들을 되 짚어본다. 무엇보다 알마니 검은 정장을 입은 그 자의 금발머리와 매서운 눈매가 잊혀지지 않는다. 자연스레 알마니 정장 남자의 행적을 생각하는 성빈.

핫야이에서 만났으므로 그 남자는 태국에서 출발하여 나와 같이 쿠알라 룸푸르로 넘어왔다. 국경을 넘은 후, 푸두라야 도착은 자연스럽다. 국경을 넘는 버스의 종착역은 거기니깐. 아마도 내가 도착한 후 20분 이내에 도착을 했겠지. 제길 그 놈의 1.2링깃짜리 나시르막만 먹지 않았어도 안 마주치는 건데… 성빈을 공격했으나, 어이없게도 놓친 후, 그는 성빈을 따라 뉴질랜드로 왔다. 따라온 것이라기 보다는 원래의 목적지가 뉴질랜드이다.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외모로는 분명 북유럽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뉴질랜드 인물일 가능성이 짙다. 분명 오클랜드 공항에서 여러 명의 검은 정장 남자들과 합류했다. 그 남자들을 그 사이 외국에서 불러들인 것일까? 그건 좀 어려울 듯 싶다. 푸두라야에서 도망친 후, 쿠알라 룸푸르 센트랄역으로 이동하여 공항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고속기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 비행기표를 재발급 받고 비행기를 타고 그 날 저녁 말레이시아를 떠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뉴질랜드에 있었다는 가정이 더욱 그럴 듯 하다. 더욱이 그들은 3대의 검은색 테리토리를 버젓이 주차금지구역에 세워놓지 않았는가. 분명 전문가 냄새가 난다. 정부 요원이라는 냄새까지 난다.


그렇다면 SD 메모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게 중요하다. 그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모바일에서 SD 메모리를 꺼낸다. 그리고 혜원과 함께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SD 안에는 뉴질랜드의 현재 집권당 Works 당과 최대 라이벌 National 당의 지지도 분석 자료가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2년 이상 지낸 성빈도 대략은 알고 있지만, 혜원은 Works당이 12년이나 집권했으며 정체될대로 정체되어 내년 총선에서는 People 당이 집권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다음 자료는 베로 보험 회사의 주가 분석 자료 및 주식 매도/매수 계획서. 지난 5년치와 향후 3년치의 분석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송금 확인서들! 정말 쏟아졌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 . . 다음회 안내 . . . - 성빈과 혜원은 SD 카드 안에서 지구를 한반퀴 돌아 오는 송금에 대한 엄청난 자료들을 확인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는 혜원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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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시내 Sky City & Hilton Hotel  -  11월 24일. 월 6:40am


저스틴은 피 냄새 풍기는 남자를 물리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영국에 있는 케이트와 몇 차례 통화를 했다. 저녁 늦게 자료가 쏟아져 들어왔다. 첫번째 자료는 MI6 작전국 Global Issue 정기 보고서였다. 훑어봤으나 별 특이사항은 없었다. 두번째는 피터 백작과 알렉스 차기 대표의 지난 일정이었다. 둘 다 말레이시아에 같은 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은 없다. 세번째로는 이혜원이라는 인물을 29년간의 행적을 추적한 1차 자료였다. 아무리 MI6 라도 몇 시간만에 29년을 추적하긴 어렵겠지. 사실 이혜원의 자료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최종 보고서에서 그녀의 은행 업무 관련 기록이나 체크해 볼 생각이었다.

네번째 자료 뭉치는 양은 많았으나 필요한 부분을 금방 찾았다. 어제 오전 공항에서 요청한 쿠알라 룸푸르 출발 - 오클랜드 도착 승객 중 동양인만 추려낸 리스트였다. 케이트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원하는 이는 강성빈이라고. 그에 대한 자료 또한 PBI Level 3 로 조사해서 보내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무 단서도 없는 이 하루. 긴 하루가 될 듯 하다. 어쨌든 강성빈과 이혜원이라는 이름은 잡아냈다. 이제 무슨 일인지 곧 알게 되겠지. 



빈센트는 여느 때와 같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어제 저녁의 긴장과 짜증을 풀기 위해 부른 콜걸이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그 알마니 검은 정장을 꺼내 입고는 윗 층의 추격 본부로 올라갔다. 몇 명의 정보수집팀이 빈센트를 보고는 자료를 건내준다. 쿠알라 룸푸르에서 티모시에게 요청한 쿠알라 룸푸르 입출국자 명단이었다. 이건 필요없다.

그 동양놈이 어제 오클랜드에 입국했다. 어제 오전의 입국자 리스트만 확인하면 됐다. 정보수집팀에게 너무도 쉬웠다. 뉴질랜드 입국자 명단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고 공항 내 CCTV를 확인하니, 빈센트는 강성빈이란 이름과 얼굴을 확인했다. 찾았다! 놈의 신원은 확보됐다. 이제 놈이 어디있는지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어제 옆에는 여자가 있었다.

이미 어제밤 정보수집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여자를 찾으라고 해 놓았다. 분명히 말레이시아에서는 혼자였는데, 뉴질랜드의 비아덕트에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 여자가 뉴질랜드에 이미 있었다고 생각하는게 합리적이다. 누굴까? 누굴까? 그 동양 커플은 이미 뉴질랜드에 있다. 내 안방인 뉴질랜드에 있다. IRD(국세청)와 도로교통국, 은행 중의 한 곳에서는 포착이 될 것이다. 이젠 시간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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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린의 블루버드 모텔 - 11월 24일. 월 6:30am

그 버스는 그레이 린, 포인트 체발리에, 아본데일, 뉴린을 거쳐 핸더슨 깊숙히까지 들어가는 163번 버스였다. 예전에 뉴질랜드에 지낼 때, 아본데일에 살았던 성빈은 오히려 자신이 잘 아는 지역으로 가니 마음이 좀 놓였다. 그는 당황한 것인지 뛰어서 숨이 차는 것인지 확인 안 되는 혜원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모바일을 꺼내 잠시 노려보다 전원을 끄고 배터리를 본체에서 분리시켰다. 그들은 뉴린을 지나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거기에는 예전부터 수도 없이 지나쳐온 블루버드 모텔이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방을 하나 간신히 잡고, 맥주를 몇병 마셨다. 맥주로 배가 부르자, 성빈은 위스키를, 혜원은 초코렛 맛 베일리를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모든게 좀 안정적으로 보였다. 둘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함께 샤워를 했다. 그리고 함께 침대속으로 다이빙을 해 지난 6개월간의 그리움을 채웠다.

약간의 숙취를 느끼며 일어난 성빈이 시계를 보자 6시 30분이었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날은 벌써 환했다. 커피를 타 온 성빈은 발코니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입에 물고는 생각에 빠졌다. 시작은 태국의 핫야이를 막 지나 말레이시아의 입국사무소에서였다. 거기서 처음으로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 놈을 처음봤다. (성빈은 이제 이 표현이 너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 놈은 분명히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한건 아니지만, 내가 여권에 도장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순순히 나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 놈이 먼저 사무실을 떠났고, 그 다음에 쿠알라 룸푸르에서 봤을 때는 나의 팔을 꺾고는 화장실로 질질 끌고갔다. 분명 화장실에 가서 나에게 포르노 DVD나 팔려는 건 아니다. 이미 그 때는 적대적이었다. 왜 그럴까? 입국사무소와 쿠알라 룸푸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입국사무소의 사무실에서 도장을 고쳐 받을 때, 그는 웃옷을 벗어서 의자에 걸쳤다. 그리고 모바일을 꺼내 책상에 올려놨다. 나와 같은 모바일. 같은 모바일. 똑같이 생긴 모바일. “그거다” 성빈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혜원이 부시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성빈에게 온다. 성빈은 커피를 한잔 따라주며 설명을 한다.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 놈하고 말레이시아 입국 사무소에서 모바일이 바뀌었다. 그 놈은 입국사무소를 떠나 버스에 오른 뒤에야 모바일이 바뀐 것을 확인했겠지. 버스는 달랐지만 거의 같은 시각에 입국사무소를 통과했으니 거의 같은 시각에 쿠알라 룸푸르의 푸두라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것이다. 성빈은 아침으로 사 먹은 Lasi Lemak이 떠 올랐다. 그걸 먹고 있다가 그 놈에게 발각되고, 그 놈은 나를 끌고 화장실로 가려고 했다. 아마 가서 모바일을 내 놓을라고 하려고 했겠지만 몇십센트에 목숨을 건 용감한 화장실 수금 아저씨 덕분에 빠져나왔다. 그 후 놈을 본건, 오클랜드 공항. 기다리던 일행이 있던 걸로 봐서는 그 놈의 목적지가 뉴질랜드였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공항 밖에 세워놓은 3대의 테리토리도 그 일행이 가져온 것이겠지.


우리가 공항을 빠져나와 미션베이에서 햄버거를 먹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비아덕트에서는 알고 있다는 듯이 수색을 했다. 그 몇시간 동안에 우리 위치를 추척했다. 어떻게? 뭔가 미흡하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 그 놈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건 내가 그 놈의 모바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다. 성빈은 혜원이 비아덕트에서 친구와 통화 중일 때, 자신이 모바일의 전원을 켰다는 것을 기억했다. 모바일이다. 모바일의 GPS로 찾은 것이다. 도대체 이 모바일을 왜 그리 찾는걸까?

그 놈의 비싼 알마니 정장과 일행들을 보건데, 정부 혹은 정부기관에 필적하는 대형집단의 놈들이다. 지금 켜 놓으면 전화가 올까? 전화만 온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돌려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과연 그들이 순순히 그렇게 할까? 쿠알라 룸푸르에서도 물어봤다면 바로 돌려줬을텐데, 왜 그리 과격한 방법을 썼을까? 쿠알라 룸푸르에서 이미 폭력을 행사하고, 오클랜드 한 복판에서 몇 명의 똘마니를 데리고 죽기살기로 따라온 놈들이 그냥 돌려준다고 하면 “아~ 네. 감사합니다” 하며 물러날까? 성빈과 혜원은 마주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부숴버릴까? 그럼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럴 것 같진 않다.

정부기관 혹은 정부기관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놈들이라면 어제 입국자만 조사하면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내년부터 대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사랑하는 연인도 여기 있는데, 요 좁은 오클랜드에서 언제까지나 도망만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성빈이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혜원은 샤워를 마치고, 가방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오빠, 우리 사진 찍어요~ 이제 메모리 카드에 용량이 얼마 없어서 몇 장 찍으면 꽉 찰거 같아” 이거다! 즉시 성빈은 모바일을 꺼내 옆 면을 확인한다. 있다. SD 메모리 칩이 하나 꽂혀있다. 급히 꺼내 자신의 모바일에 삽입하고는 똘망똘망한 눈빛의 혜원과 함께 자료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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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클랜드 – 11월 23일. 일 7:48 pm

SkyCity Hotel

자신이 머물고 있는 SkyCity 호텔로 돌아온 Justin은 금요일 밤 MI6 사무실에서 Kate에게 요청해 놓은 Peter와 Alex의 지난 일주일 행적을 정리한 자료를 보며, Kate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제 요청했던 뉴질랜드의 이혜원이란 여자 기억하지? 응. 그래. 내가 조회한 차량의 소유주. 응. 그 여자가 태어난 날부터 오늘까지의 모든 과거를 다 추적해. 아냐아냐, 개인 신상 명세를 달라는 말이 아냐. 백그라운드, 누구와 어디 살았고, 누굴 만나고, 잠버릇은 물론, 첫사랑부터 지금 애인까지 다 조사해. 응. PBI(Person Background Investigation) Level 3 Protocol에 따라 깊게 조사해. 특히 업무에 대해서도 깊게 조사해봐. 은행에 근무하니깐, 업무까지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Justin은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Kate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Kate와는 4년이 넘게 함께 일을 해서 그녀도 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그리고, 오늘 오클랜드 공항에 입국한 모든 승객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PBI Level 2 Protocol에 의해 조사해서 바로 나한테 보내. 응. 오전 11시 이후에 입국한 사람은 필요없어. 새벽부터 11시까지 도착한 항공기들만 조사하면 돼. 업데이트 되면 전송하고, 바로 전화해줘. 아, 그리고 Kate 미안해. 일요일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Justin은 전화를 끊고 다시 밖을 바라본다. 자신은 Project Kairos와 Peter 그리고 Alex를 따라 8시간 전에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 하자마자 공항에서 이 커플이 도망치는 것을 목격했고, 지금은 거의 죽기 직전에 구해줬다. 그리고 그 사내. 피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그 사내. 그는 분명 전문가였다. 일반인이라면 나의 의도를 그렇게 알아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를 보는 순간 양복 안 쪽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총집을 차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는 누굴까? 분명 MI 라인은 아니다. 그럼 CIA나 NSA? 밀리터리 작전 위주로 움직이는 CIA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역시 NSA? NSA에서 Project Kairos에 대한 보고서를 내게 보냈고, 난 뉴질랜드에 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문가와 마주친다. NSA 일 확률이 높다. 이스라엘의 모사드나 KGB일리도 없다.

잠깐, 그 놈은 아침에 입국했다. 그 사이에 총을 구했다? 총집까지? 마피아나 테러집단이 해외 현지 조달책을 통해 총을 입수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총집까지? 세상에 어떤 마피아가 총집까지 구해 찬단 말인가. 지금이 서부개척시대도 아니고. 그럼 역시 정부기관쪽이다. NSA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놈이거나… 아! Justin은 순간 손벽을 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NZSIS가 있지 않은가? 조용하고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고, 별 큰일 없는 나라기는 하지만, 어쨌든 여기에도 뉴질랜드 보안정보부가 있지 않은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검은 정장의 사내들과 합류하고, 총을 구하고, 몇 시간만에 그 동양 커플의 위치를 잡아내서 추적하고… 역시 NZSIS라는 추론이 가장 설득력있다. 가만 Alex가 집권 여당인 Works 당의 차기 대표라고 했지. Alex 정도라면 NZSIS쪽에 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Peter, Alex, NZSIS, 쫓기는 동양 커플. 연결 고리는 찾은거 같다. Justin은 다시 전화를 했다. “Kate. 하나만 더. 그 이혜원이란 여자의 모바일을 실시간 감청하고 GPS가 잡히는대로 나한테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해줘. 고마워


Auckland Hilton

Vincent는 추격팀의 임시 본부인 힐튼 호텔의 방으로 들어오면서 문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쳤다. 쓰레기통은 거실을 가로질러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딫쳤고, 모두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이럴때 말을 꺼내는건 자살행위였다. Vincent는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가다가 믹서기를 보았다. 여긴 스위트룸이고 과일이라도 갈아 먹으라는, VIP들의 건강을 세심하게 배려한 호텔 측의 의도와는 달리 Vincent는 그 동양놈을 저 믹서기에 넣고 갈아버리고 싶었다. 믹서기가 작아 한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부위 별로 토막이라도 내서 갈아버리고 싶었다.

길바닥의 개미를 밟듯이 죽여버릴 수 있는 이 애.송.이. 놈이 너무 저주스러웠다. 태국에서는 내 모바일을 집어가고, KL에서는 나를 공격하고 빠져나갔으며, 나와 비슷한 시각에 오클랜드 공항에 있었고, 방금 전 내 눈 앞에서 유유히 빠져나갔다. 성빈과 혜원이 탄 버스를 봤지만, 이 나라 버스의 절반은 옆면과 뒷면에 버스 번호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Justin은 그 버스도 저주스러웠다. 도대체 그 동양 기집애는 또 누구지? 아니,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나를 가로막은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살인 교육을 받은 Vincent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왕복 6차선을 넘어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분명 전문가 냄새가 났다. 자신만큼 살인 교육 위주로 받은 것인지, 정보기관 소속인지, 프랑스의 용병 부대 출신인지 모르겠으나, 분명 전문가였다. 총을 뽑아 들었다면 둘 다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오클랜드의 제일 복잡한 거리에서 자신이 총에 맞아 병원에라도 실려간다면 자신의 정체가 노출될지도 몰랐다. NZSIS가 오클랜드 한 복판에서 총을 들고 외국인을 추적했다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렇지 않아도 뉴스거리도 없는 이 나라의 언론은 월드컵 때 영국을 뒤짚어 엎는 스킨헤드만큼이나 뒤집어 질 것이다.

뉴질랜드 헤럴드는 ‘정보기관이 도로 한 복판에서 민간인 살해 위협, 낭비되는 혈세’라는 제목으로 한달 간 춤을 출 것이고, 방송국은 그 거리로 뛰쳐 나와 지나가는 개나 소나 붙잡고 증인이라며 인터뷰를 할 것이다. 북섬 북쪽 끝에 있는 뉴질랜드의 가장 작은 도시 Kerikeri부터 남섬 최남단에 있는 Dunedin까지 온 나라가 NZSIS에 대해 떠들것이다. 정치인들, 특히 People 당의 공세와 언론, 그리고 해외 언론까지 기사화 할 것이며, 해외 정보기관들도 NZSIS를 자신들 앞가림도 못하는 저능아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계속 떠들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과 Tim, 그리고 Alex가 세상에 드러나게 될 수도 있었다. 아. 이건 재앙이었다. 그 순간 서로 총을 뽑지 않은 것은 그나마 신께서 내게 주신 작은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잠깐, 서로 총을 뽑는다. 서로 총을 뽑는다. 총이 뒷 춤에 있는 그 보다는 양복 앞쪽 안에 있는 내가 훨씬 더 빨랐을 것이다. 그는 분명 나를 겨냥하기도 전에 내 총에 쓰러졌을 것이다. 6차선 정도라면 나는 한방에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 자가 허리춤에 손을 넣는 것을 보고 나도 내 총을 잡았다. 그는 왜 허리 뒷춤에 총을 넣어놨을까? 보통 안 쪽에 총을 차고, 뒷춤의 총은 예비용으로 사용하는데. 양복 안쪽의 총을 잡지 않았다는 것은, 총집을 차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고.. 총집을 차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제길! 속았다. 그는 총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속이기 위해 허리 뒷춤에 총을 꽂았다는 듯이 손을 허리 뒤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총을 양복 안쪽에 찰 경우 전문가들은 그 부피감으로 총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길을 건너려고 하자, 안전하게 그 동양놈을 빼돌리기 위해 쇼를 한 것이다. 자신에게는 총이 없지만 이대로 몇 초만 상대방을 속이면 된다고 판단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나에게 확실한 의도를 전달했으며, 뒷 춤으로 손을 찔러 넣은 상황 판단과 반사 신경. 이건 좋지 않다. 전문가다. 반드시 전문가여야만 했다. 전문 킬러와는 다르다. 전문 킬러라면 일단 총을 쏘고, 곧바로 퇴로를 확보했을 것이다. 역시 정보 기관 냄새가 난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난거지? 아니 왜 나타나서는 그 놈을 도주시킨거지?


Vincent는 옆에 숨을 죽이고 있는 정보수집팀에게 Sky Tower 앞에서 출발하는 모든 버스의 번호와 노선을 확인하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동안 입국한 모든 사람들의 신원을 다 조사해서 자신을 가로막은 그 외국인을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말레이시아에서 오클랜드로 입국한 모든 승객 가운에 그 동양 남자를 찾아내라고 했다. 여긴 뉴질랜드고 내 홈그라운드다. 외국인이든, 동양놈이건 이 나라에 입국한 이상 찾아낼 수 있다. 반드시 찾아내리라. Vincent는 태국에서 모바일을 책상 위에 꺼내 놓은 자신 자신을 다시 한번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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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TAG 거래, 추론

Auckland Viaduct – 11월 23일. 일 5:53 pm

성빈은 눈 앞에 보이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가장 멋진 지역. 왼쪽으로는 수 많은 요트가 자신들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한가로이 요트를 정비하는 멋진 키위들(뉴질랜드인),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여행객들, 걸어오면서 키스를 해대는 젊은 연인들 오클랜드의 명물이자 가장 고급스러운 카페와 Bar들이 즐비한 이 Viaduct의 입구 모퉁이에 있는 Degree Bar에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의 사내가 뒤에 검은 정장의 사내 3명을 대동하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도대체 저 놈은 나랑 무슨 웬수가 졌다고 태국에서부터 나를 따라 다니며 숨도 못 쉬게 하는거야.

그가 모습을 보인 Degree Bar에서 성빈이 있는 Soul 까지는 1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야외에 앉아 있는 성빈은 바로 발각될 터였다. 주변을 찬찬히 확인하며 걸어오는 알마니 검은 정장. 뒤에 있던 검은 정장들은 Bar 안으로 들어가거나 윗층을 확인하며 알마니 정장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저건 수색이다! 성빈은 순간적으로 지겨웠던 군대에서의 훈련들이 떠올랐다. 기무사령부라는 군 정보부에 근무했던 탓에 일반 군인보다는 더 밀도 높은 훈련을 받은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KL에서도 한 순간에 상대방을 제압하고 도망친 것 아닌가. 아무튼 지금 중요한건 저들이 수색을 하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색을 하며 다가오기에 거리상으로는 이제 60미터도 안 남았지만, 몇분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들은 Viaduct가 시작하는 오른편에서 오고 있었다. 성빈이 무작정 왼쪽으로 도망친다면 그들 눈에 바로 띌 것이다.

성빈은 머리를 굴렸다. 이 Soul 왼쪽에는 Mecca가 있고 그 옆에는 Forte라는 이탈리아 식당이 있다. 그래! 그 식당에는 다운타운 쪽으로 나가는 샛길이 있다. 성빈은 살며시 혜원의 손을 잡고 일어나 20불짜리 지폐 하나를 카운터에 던지듯이 주고 옆 Mecca 로 이동을 했다. 노천 카페라 테이블 사이로 비집고 이동하면 큰 무리는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혜원의 귀에 성빈은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이야”라고 속삭이고, 혜원의 손을 계속 잡아 끌었다. Mecca를 다 통과하자 Forte가 나왔고 역시 뒷길이 있었다. 샛길로 빠지며 뒤를 살짝 돌아보니 그들은 20미터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팀장님.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전방 약 40m 거리입니다.” Vincent의 왼쪽 귀에 꽂힌 이어폰으로 힐튼 호텔의 임시 본부에서 급히 알려왔다.
수색을 멈추고 따라와. 타겟이 이동한다” Vincent는 소리치고 먼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성빈은 샛길을 지나는 동안 이동 경로를 생각해 두었다. 샛길을 빠져 나오자 마자 왼쪽으로 꺾어 오클랜드 시내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다운타운 사거리로 갈 것이다. 기차역, 수십개의 버스정류장, 창고형 할인매장 WareHouse, WestField 쇼핑몰, 면세점 등이 모여 있는 그 사거리에서 오클랜드의 메인 도로 Queen St. 을 따라 MidTown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Queen St.과 Victoria St.이 만나는 두번째로 복잡한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Sky Tower 방향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자신은 오클랜드에서 6년을 살아 시내의 모든 길, 건물들의 출입구, 골목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KL에서와 같이 뒷 머리채를 잡히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따돌리고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벌써 다운타운의 큰 사거리가 보였다. 혜원의 손을 붙잡고 마구 뛰었다. 사실 왜 뛰어야 하는지 잘 이해는 안 됐지만,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 놈이 한 행동을 봤을 때 뛰는게 좋았다. 사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운 좋게도 신호등이 바꼈고, 길을 건너 혜원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Queen St. 을 따라 계속 뛰었다.

V
incent 옆에서 뛰고 있는 John의 손에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GPS Navigation 업체 NavMan의 최신형 S200이 들려 있었다. 힐튼 호텔의 정보수집팀이 Vincent의 모바일 위치를 GPS로 잡아 John이 들고 있는 S200 으로 전송해 주고 있는 것이다. 순간 Vincent는 여기가 방콕이나 홍콩이 아님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수 많은 골목과 건물 사이의 틈(정확하게 이것은 길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리로 다닌다. 제길)으로 인해 GPS 추적이 거의 의미가 없는 그 도시가 아니라, 모든 길은 반듯반듯하고 건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추적이 용의한 오클랜드인 것이다.

그러나 Forte 레스토랑의 샛길(정확하게는 뒷길로 난 작은 문이기에…)을 모르는 Vincent는 Viaduct의 거리를 돌아서 다운타운 사거리로 왔고, 덕분에 120미터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 “더 빨리” Vincent와 3명의 남자는 사거리에 도착해 파란 신호 아래서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는 차들 사이로 뛰어 들어 길을 건넜다. 몇몇 차는 급정거를 하고 창문 밖으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바쁘지만 않았어도 저 입에 한 대 갈겨주는건데. Vincent는 Queen St.을 죽어라 뛰며, Mid Town 사거리에서 Sky Tower 방향으로 우회전하는 성빈과 웬 동양 여자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자켓을 걸쳐입고 호텔을 나와 Queen St. 방향으로 슬슬 걸어 내려오던 Justin은 Albert St.을 건너고는 Reverse Bunge 를 잠시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보통 번지점프라고 하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인데, 이건 땅에 있는 3개의 의자가 붙어 있는 공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역번지’라 , 거참 이름 한번 솔직하고 담백하네. 역번지를 지나 슬슬 걸어오던 Justin이 주차장에서 나오는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20미터쯤 앞에 있는 사거리를 바라 보았다. 자신이 있는 쪽 모퉁이에는 National Bank가 있었고, 건너편에는 StarBucks, 그 건너편에는 WhitCoulls 서점, 그리고 자신이 있는 길 건너편의 모퉁이에는 BNZ Bank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동양 커플이 그 모퉁이를 뛰어서 돌았다.

BNZ Bank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성빈은 그 알마니 검은 정장 사내 일행이 30미터 뒤까지 따따 온 것을 봤다. 제길. 혜원을 데리고 뛰는게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달리 다른 방법은 없었다. 무작정 뛰자. 커플은 Queen St을 벗어나 이제 Victoria St.으로 접어들어 뛰고 있었다. 조그만 사거리에서 대각선으로 한번만 건너면 SkyTower가 있었다. 저 속으로 숨으리라.

Justin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길 건너에서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뛰고 있는 저 커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자신과 점점 가까워지며 뛰고 있던 커플은 차량이 뜸한 틈을 타, 아예 Victoria St.을 무단횡단해서 이제는 자신과 같은 길 위에 있었다. 그 커플은 죽기살기로 뛰어 오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Justin의 표정이 더욱 황당해졌다. 그 피 냄새를 풍기는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Vincent 역시 3명의 검은 정장들을 데리고 죽으라 뛰어서 조금 전 그 커플이 지나친 BNZ Bank 모퉁이를 돌았다. 그 커플은 차량이 뜸한 틈을 타 자신쪽으로 길을 건너 왔지만, 그 검은 사내들은 여전히 건너편에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Justin은 뒷걸음을 쳤다. 왜 그랬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신속하게 뒷걸음을 쳐 Victoria St.과 Albert St.의 교차로 횡단보도에 섰다. 여길 건너면 이제 Sky Tower다. 저 커플의 방향으로 볼 때, 저리로 도망치고 있었다.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몇 초만 있으면 그 커플이 자신을 지나쳐 횡당 보도를 건너 Sky Tower 쪽으로 갈 것이고, 자신은 저 검은색 정장들을 세울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플이 횡단 보도에 도착하고 몇 초가 흐르자 신호가 바뀌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걸로 봐서는 꽤 멀리부터 뛰어온 듯 하다. 보행자에게 길을 건너라는 파란 신호등이 켜지고 성빈이 왼발을 내딛는 순간, 성빈과 Justin의 눈빛이 마주쳤다. 성빈은 웬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고, Justin은 웬지모를 운명을 느꼈다. 그 0.1초의 순간 Justin은 성빈에게 어서 가라고, 여긴 내가 막아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눈빛에 담아 성빈에게 보냈다. 성빈이 이해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빈이 길을 건너기 시작할 무렵 길 건너편에 도착한 Vincent는 지나가는 차를 모두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사거리를 가로질러 성빈을 잡을 생각이었다. 성빈은 Albert St. 만을 건너고 있었지만, 건너편에 있는 자신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야 할 형편이었다. Justin의 눈에 성빈 옆에 있던 외국인 남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그 남자는 길 건너에서 왼 팔을 쭉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멈추라는 싸인이었다. 그의 오른손은 허리 뒷춤으로 찔러 넣어져 있었다.


쌩판 본 적도 없는 남자가 자신에게 길을 건너지 말라고 무언의 싸인을 보낸다. 차도 건너편에 있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동작은 절도있고, 흔들림이나 주저함은 없다. 그는…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허리 뒷춤에 찔러진 오른손은 총을 잡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의 멈추라는 싸인을 보는 순간 Vincent 자신도 오른손을 양복 안 주머니에 반사적으로 넣기는 했다. 총집에 있는 H&K USP 45구경이 손에 잡히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나 갈등이 된다. 분명 저 남자는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옆에는 3명의 팀원들이 상황 파악도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총이 없다. 뉴질랜드에서 한번에 4명이나 총을 들고 설쳤다가는 모든게 엉망이 될 터였다. 그리고 애송이 동양 남자애를 하나 잡는데 권총이 4자루나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저 남자가 길을 건너지 말라고 한다. 건너려고 하면 저 놈은 분명 뒷 춤에서 총을 꺼내 공중으로 두 발 연사를 할 것이고, 이 복잡한 길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혹은 저 놈이 경고도 없이 바로 나에게 쏠 수도 있다. What the Fuck! 도대체 이거 무슨 해괴 망칙한 일인가. 대체 저 놈은 누구란 말이야.

둘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성빈과 혜원은 Sky Tower 바로 앞의 버스 정류장까지 이내 달렸다. 거리는 30m나 될까 말까 했지만, 성빈에게는 군대에서 하던 행군만큼 길게 느껴졌다. 달리면서도 성빈은 뒤를 힐끔 힐끔 돌아봤다. 눈빛이 마주쳤던 그 사내는 오른손은 허리 뒷춤에 찔러 넣은채 알마니 검은 정장에게 손을 내밀어 정지하라고 하고 있었다. 알마니 검은 정장도 양복 안 쪽으로 한 손을 찔러 넣은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조용하고 안전한 나라로 알려질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한 복판에서 이게 뭔 일이람. 일단 도망가자. 생각은 나중이다.

정류장에는 막 떠나려는 버스가 있었다. 성빈과 혜원은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올라탔다. 이내 버스는 출발하여 Hobson St. 방향으로 꺾었다. 근데 나를 도와준 저 남자…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신호등이 다시 한번 켜 질때까지 Justin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계속해서 차는 지나가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보행자로 횡당보도는 다시 북적거려지기 시작했다. Justin은 이제 왼 손을 내렸지만, 여전히 오른손은 뒷춤에 찔러 넣고 있었다. 약 3분간 그렇게 Justin과 Vincent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행자의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자 Justin은 그대로 천천히 뒷걸음으로 횡당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자신도 30m 올라가면 Sky City Hotel에 닿을 것이고, 일단 방으로 돌아가 수십통의 전화를 해댈 생각이었다.

Justin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Vincent는 일단 힐튼 호텔의 숙소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애송이 놈이야 모바일의 GPS로 다시 찾으면 그만이었다. 힐튼 호텔에서 Viaduct까지 뛰어가느라 검은색 Territory도 그대로 호텔에 있었다. 일단은 호텔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어야했다. 그리고 나를 방해한 저 놈을 어떻게 할 지도 고민을 해야겠다. God Damn! Vincent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해대고는 Albert St.을 따라 힐튼 호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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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ckland Viaduct – 11월 23일. 일 5:48 pm

이제서야 성빈은 좀 살 것 같았다. 공항에서 그 놈의 빌어먹을 알마니 정장 놈을 보고는 뒤도 안 보고 도망쳐 온 후에, 그대로 혜원이의 차를 타고 미션베이로 달렸다. 탱크탑인지 브래지어인지를 입고 인라인을 타는 젊은 여자들, 연인들, 아직 완연한 여름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굳굳히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키위 가족들을 보며, 성빈과 혜원은 그 틈에 섞여 혜원 얼굴의 반 만한, 미션베이의 유명한 햄버거 버거퓨어를 먹었다. 6개월 만에 만난 그 커플은 배가 터지게 큰 햄버거와 조선시대의 사약을 담아 건내주던 사발 같이 생긴 Bowl에 모카치노를 한잔씩 마신 후 , 맥주나 한 잔 할 생각으로 오클랜드 시내 다운타운의 Viaduct에 와 있었다.

Viaduct는 정말 오클랜드의 자랑 중의 하나였다.(실제로 비아덕트 입구에는 Pride of Auckland라는 커다란 간판이 서있기도 했다.) 힐튼 호텔은 바다위에 떠 있듯 웅장한 자태를 뿜어냈고, 그 뒤로 자리한 작지만 비싼 레스토랑들, 그리고 시작되는 노천 카페들. Viaduct가 시작되는 모퉁이에 위치하여, 주말 밤이면 광란의 장소로 변하는 그 유명한 Degree Bar부터 할리 데이비슨과 같은 무식하게 소리 크고 비싼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있는 Wild까지… 한쪽은 카페들이, 한쪽은 요트가 둥둥 떠 있는 선착장이 있는 그 ㄱ자로 꺽어진 거리. 불과 200미터도 채 안되는 짧은 그 거리의 중간에 위치한 Soul에 성빈과 혜원은 앉아있었다. 공항에서 왜 그리 급하게 나왔는지는 이미 혜원의 차에서 설명한 터였다. 태국에서부터 시작된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과의 악연을 혜원은 낄낄거리며 듣고 있었다. 그 남자 혹시 변태 아니야? 라고 까지 나름 추리를 하는 혜원의 반응에 성빈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이 혜원을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당시 IT 부양책을 적극으로 진행하던 말레이시아에 몇몇 프로젝트가 있어 2년 정도 체류하고, 영어 공부 겸 대학원 진학을 위해 뉴질랜드로 오자마자 길에서 혜원을 만났다. 이것 저것 묻던 성빈에게 혜원은 호감을 느꼈고, 오클랜드 대학 파이낸스를 전공하고 막 BNZ 은행에 취직한 혜원은 여러 모로 성빈을 도와주며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 2년간 머무르던 성빈은 한국으로 돌아가 이것 저것 정리를 하고 내년 초 대학원을 입학하기 위해 이제 막 들어온 것이다. “드드드드드” 혜원의 모바일이 진동했다. “하이, 제니. 예스~” 12년 전 이민을 와 중고등학교 및 대학을 모두 뉴질랜드에서 마친 혜원이 유창한 영어로 친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응~ 지금 보이프렌드랑 비아덕트에서 맥주 마셔” 라고 말하며 혜원은 성빈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혜원의 전화통화를 바라보던 성빈은 문득 싱가폴에서 산 모바일, 공항에서 떨어뜨렸던 모바일이 생각났다. 그 놈의 알마니 정장 남자 때문에 다시 전원을 켜지도 못하고 백에 구겨 넣은채 공항을 나온 것이 생각났다. 꺼내보니 역시 전원은 꺼져 있었다. 전원을 켜자 몇초 후 모바일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어서 자기를 살펴 봐 달라는 듯이 기다렸다. 어?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새 제품을 산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뭔가 세팅이 다르다. 전화 번호도 하나 저장되어 있다. 손 때도 묻어있고, 자그마한 스크래치들도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혜원이 전화를 끊고, 또 성빈에게 놀아달라고 투정을 부린다. 혜원과 대화를 하면서도 머리 한 쪽 구석에는 이상해진 모바일이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검은색 알마니 정장만 입고 다니는 Vincent의 안방은 뉴질랜드, 그 중에서도 오클랜드였다. KL에서 Tim에게 보고를 하고, 뉴질랜드에 BackUp 팀을 준비해 달라고 하고는 일단 뉴질랜드로 오늘 낮에 막 입국한 참이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자신의 팀과 검은색 Territory를 타고 오클랜드 다운타운의 힐튼 호텔에 추격을 위한 임시 본부를 마련했다. 열명 남짓의 팀원 중 절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뉴질랜드 보안정보부(NZSIS, NZ Security Intelligence Service) 소속이었다. Vincent는 이들을 ‘정보수집팀’으로 묶었다.

나머지 반은 어딘지 모르는 나라의 전쟁터에서 굴러 먹었던 용병이거나, 전투 훈련을 받은 적 있는 특수 인원들일 것이다. 어쨌든 Vincent 자신은 그들의 신상에 관해서는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명령에 충실(대부분이 살인이거나 상대방 제압, 무력화, 구속, 납치, 경호등이겠지만)하기만 하면 된다. Vincent는 그들을 ‘지원팀’이라는 완만한 표현으로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

NZSIS에서 가져온 GPS 추적장치부터 여러 대의 랩탑들의 Network를 세팅하고, NZSIS의 기밀 절차를 밟아 애셜론의 자료 수신 및 분석 준비까지 맞췄다. 자신이 강탈당한 (Vincent는 계속 자신이 모바일을 강탈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음이 덜 불편했다.) 모바일에는 도청 방지 장치와 특별한 GPS 장치가 있어 전세계 어디서든 켜지기만 하면 찾아낼 수 있다. 누가 가지고 있건 (분명 그 동양놈이겠지만) 켜지기만 하면 찾을 수 있다.

추격팀이 모든 장비의 세팅을 켜고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다 “어, 어, Vincent 팀장님” 하고 말을 꺼낸 건 불과 15분 전이었다. “오늘 낮에 오클랜드 공항에서 모바일이 켜졌었습니다. “ Vincent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삐- 소리와 함께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지금 Viaduct에서 모바일이 켜졌습니다.” 비아덕트라면 자신이 지금 있는 힐튼호텔에서 200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 “정보수집팀은 여기에서 계속 추적을 하며 나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해. 지원팀은 지금 나를 따라와” 하고는 나는 듯이 뛰기 시작했다. 



Justin은 오클랜드 어디서나 보이는 오클랜드 타워에 붙어있는 SkyCity Hotel 에 숙소를 잡고 오후 내내 방에 있었다. 그가 여기 숙소를 잡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호텔이 제일 유명하고, 시설이 좋아보였으며, 시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MI6로 요청한 차량의 조회는 방에 짐을 풀자마다 도착했다. “이혜원, 이민 12년, 오클랜드 대학 파이낸스 졸업, 3년전부터 BNZ 은행의 Risk Management 팀에서 근무. 차량번호 BPZ722 , 모바일 번호, 집 주소, 가족 사항” Justin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었다. 차량 번호로 차주를 검색했을 것이고 이름 석자가 뜬 후에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도 쉬웠을 터였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세계 3대 정보기관이라면 영국의 MI6, 미국의 CIA, 이스라엘의 모사드 아니였던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고, 방금 죽은 사람 정도는 그 고문 실력과 집요함에 벌떡 일어난다는 KGB가 있었지만, KGB도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J
ustin은 오클랜드의 하늘이 좋았다. 구질구질하고 매일 비가 내리는 런던에 비하면 여긴 정말 화창한, 말 그대로 하늘이 찢어질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창 밖으로 오클랜드의 하늘에 취해 있던 Justin은 정식으로 휴가를 신청해 버릴까 하다가, 문득 그 공항에서 본 동양 커플이 생각났다. 그들은 왜 그리 도망치듯 떠났을까? 그 검은 정장의 사내와 연관이 있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도 못했던 이유일까? 빚쟁이라도 본 것일까?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이건 오버야’라고 생각하던 Justin의 주위를 끈 것은 노트북 한 쪽 귀퉁이에 떠 있는 ‘감청 메시지 도착’ 알림 아이콘이었다.

그가 재생을 하자 혜원과 제니라는 친구의 대화가 노트북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온다. 당연히 중국어나 일본어 혹은 베트남어나 한국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여자는 유창한 영어로 Viaduct 라는 곳에 있다는 애길 자랑스럽게 한다.  옆에 있던 가이드 북을 꺼내 확인하니, 그리 멀지 않다. 이 화창한 날씨에 내내 호텔 방에만 있던 Justin은 웬지 모를 호기심에 자켓을 걸치고 호텔방을 나섰다. 사실은 그 동양 커플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Viaduct가 너무 멋져 보여 커피라도 한잔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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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오클랜드 국제공항  - 11월 23일 일. 11:47am

성빈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금요일 밤차를 타고 태국에서 말레이시아까지 왔고, KL에서 가장 복잡한 Puduraya 버스터미널 한 복판에서 웬 미친놈한테 강도를 당할 뻔 했다. 오른쪽 어깨가 아직도 쑤시는 듯 했다. 토요일 낮에 KL Central 역에서 점심을 패스트푸드로 떼우고 책이 100권이나 될까 말까한 간이 서점에서 편치 않은 영어로 된 책을 뒤지다 KLIA Express 고속 열차를 타고 KL 국제공항으로 가 다시 밤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 오클랜드 국제공항에 두시간 전에 도착한 것이다.


오클랜드 국제공항은 항상 오전 10시에서 2시가 가장 복잡했다. 입국 수속을 하기 위한 사람이 많아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시드니에서 출발한 승객 400여명을 태운 보잉 747은 9시에 도착했어야 했으나 연착으로 10시에 성빈의 말레이시아 항공과 같이 도착했다. 제길. 그 외에도 연착된 비행기가 한 대 더 있고, 예정 시간보다 50분이나 일찍 도착한 비행기까지 모두 10시에 오클랜드 공항에서 만난 것이다. 연착은 그렇다쳐도, 50분이나 일찍 도착하는건 대체 뭐야. 기장이 과속이라도 한거야 라고 성빈은 투덜거리며 입국수속을 기다렸다. 성빈은 노트북과 여벌 옷 한벌이 든 백 하나가 전부였다. 어차피 대부분의 짐은 오클랜드 시내 혜원이의 아파트에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수속이 조금 빨리 끝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나왔다.

오클랜드 공항은 성빈이 지금까지 본 공항 중 가장 작은 공항이었다. 요만한 사이즈의 공항이 국제공항이라는 것에 항상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천 국제공항이나 일본 오사카의 앞바다에 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간사이 공항을 오간 성빈에게 오클랜드 공항은 유치원처럼 보였다. 그런 오클랜드 공항이지만, 바쁜 시간에는 나름 복잡하기에 성빈은 오클랜드 공항에서 누굴 만나기 위한 장소로 언제나 맥도날드를 이용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 나오면 바로 좌측에 테이블이 8개쯤 있는 맥도날드가 있다. 맥도날드를 둘러보지만 역시 자리는 없다. 그리고 성빈을 마중나오기로 되어 있는 혜원도 없다.

커피를 하나 사서 다시 둘러보다 혼자 앉아있는 점잖은 외국인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가서 합석을 해도 되는지 물어본다. 그 남자는 성빈을 쓱 쳐다보더니 그러라고 한다. 성빈은 그 남자에게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입국수속을 마치고 오른쪽의 게이트(오클랜드 공항의 작은 사이즈로 인해 입국하는 사람이 나오는 게이트는 달랑 한개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간간이 좌측의 건물 밖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주시한다. 혜원이 나타날 곳은 저 유리문이기 때문이지만, 우측의 사람들을 구경하는게 더 재미있기는 하다.



등에 맺 가방도 풀지 않은채 엉거주춤 앉아 혜원을 기다리던 성빈은 싱가포르에서 산 신형 모바일이 생각났다. 이제 GSM을 사용하는 뉴질랜드에 왔으니 켜 보자라는 생각으로 백에서 모바일을 꺼내 전원 버튼을 3초 누르고 있었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모바일이 켜지기 시작했고, SAMSUNG이라는 로고가 뜨는 동안 성빈의 눈에 유리문으로 다가오는 혜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자 모바일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배터리가 본체에서 튕겨져 나왔다.

모바일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 순간 성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바닥으로 바라봤다. 저 우측의 게이트에서 반질반질한 검은 양복을 입은 그 남자가 나오는게 아닌가? 그 좋은 체구와 눈이 부실듯한 짧은 금발.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성빈은 본능적으로 몸을 최대한 낮춰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혜원은 이미 유리문을 통과해 맥도날드로 걸어오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남자가 혜원과 5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유리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혜원은 그 남자가 스쳐 지나갈 쯤, 성빈을 발견하고는 걸음이 빨라졌다. 성빈의 머리가 미친듯이 돌아갔다.

저 놈은 인파가 수백명 되는 한복판에서도 나를 공격한 놈이다. 분명 미친놈이거나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권 도장을 다시 받으라고 자길 도와준 나를 아침 6시에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공격했을까. 어쨌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알마니 검은 정장은 유리문 앞에서 예닐곱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합류를 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빠!” 고개를 들어보니 혜원이 웃으면 달려와서는 안긴다. 혜원을 안고는 눈으로 계속 그 남자를 주시한다. “보고 싶었어. 오래 기다렸어?” 라고 혜원이 얘기한 듯 하지만 성빈의 귀에는 잘 안 들어온다.

모든 신경은 알마니 정장에게 가 있다.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그 외의 여러명도 신경쓰인다. 그들은 유리문 바로 앞에서 뭔가 열심히 대화중이다. 서류도 주고 받고 있다. 눈에 안띄게 여길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 때였다. 알마니 검은 정장이 일행에게서 떨어져 우측으로 10미터쯤 걸어가더니 화장실로 들어가는게 아닌가? 찬스였다. 성빈은 혜원의 손을 꽉 잡고 빠른 걸음으로 유리문으로 향했다. 유리문 옆에서는 알마니 검은 정장과 합류했던 7명의 사내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을 스쳐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가자 혜원의 손을 이끄는 성빈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건물 밖으로 나온 성빈은 건물 바로 앞의 주차금지구역에 주차되어 있는 Ford사의 검은색 Territory 3대를 봤다. 그리고 더욱 빠른 걸음으로 혜원의 차에 올라타 출발을 했다. 



Justin은 30분 전에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금요일 밤에 사무실에서 밤을 세는 중 그 놈의 Peter에 대한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Justin은 케이트에게 토요일 비행기를 알아 보라고 한 뒤 아침 6시에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갔다. 잠시 눈을 좀 붙인 후 , 또 노트북으로 정세 보고를 받고는 다시 잠시 고민을 했다. 정말 뉴질랜드로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케이트한테 비행기 잡으라고 한거 가자. 가서 별 볼일 없는 정보라면 그대로 지난 2년간 한번도 써 본적 없는 휴가를 신청해 버리리라.

그리고는 일주일 정도 조용한 뉴질랜드에서 푹 쉬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온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와 보니, 막막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여기 온 결정 자체가 미쳤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웬 동양 남자가 앞의 자리에 합석을 해도 되냐고 물은 건 그 때였다. “Of course” 그 남자는 누굴 기다리는지 연신 게이트쪽이나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역시 난 미친거야. 맘 편하게 휴가나 신청하자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그 순간이었다. 이 동양 남자가 갑자기 자세를 낮추며 경계를 하는 것이었다.

Justin은 동양 남자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열명 정도의 사람들이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14년을 정보 계통에 근무한 Justin은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내를. 두 손은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었고 눈은 계속 주위를 살피고 있으며, 걸음 걸이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보폭은 일정했다. 그건 특수 훈련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진한, 방금 도살한 소에게서나 날 법한 진한 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Justin은 이 동양 남자가 저 검은 정장의 남자를 경계함을 알아 차렸다.

그 사이 이쁜 동양 여자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를 끌어 앉았다. 머뭇거리던 동양 남자는 검은 정장이 화장실로 가자 여자 손을 이끌고 유리문 쪽으로 이동했다. Justin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동양 커플을 따라 나갔다. 커플을 따라가던 Justin은 맥도날드와 유리문 중간쯤에 있는 비행기 도착 안내판을 발견하고는 5초 정도 멈춰 안내판을 빠르게 훑었다.

그는 검은 바탕의 붉은색 글씨들 중에서 10시에 도착한 말레이시아 항공의 비행기를 확인하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유리문 밖으로 나간다. 벌써 동양 커플은 저만치 가고 있었다. Justin 역시 유리문을 나오며 바로 밖의 주차금지구역에 주차되어 있는 3대의 검은색 Territory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달려가다시피 한 Justin은 막 떠나는 동양 커플의 차 번호판을 간신히 외웠다. 그리고 모바일을 꺼내 런던의 자기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오클랜드 공항에 10시에 도착한 KL 출발 – 오클랜드 도착 말레이시아 항공의 승객 리스트 중 동양인 명단을 확보하고, 뉴질랜드 차량 BPZ722의 차주를 조회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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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 MI 6 작전부 - 11월 22일. 토 01:02am

그 괴물이 요주의 인물 Peter백작의 전화를 감청한 것은 2시간 전이었다. 그 괴물은 바로 애셜론(Echelon)이었다. 애셜론은 한 건물도 아니고, 한 도시도 아니고, 한 나라도 아닌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동시에 감청한다. 전화, 이메일, 팩스, 위성 통신은 물론 항공기, 선박의 무선 통신도 감청 할 수 있다. 1947년 영국과 미국의 비밀 협정인 UKUSA 협정에서 시작된 애셜론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를 2차 가입국으로 받아들였으며, 한국, 일본, 터키를 3차 가입국으로 받아 함께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한다. 물론 3차 가입국이 활용할 수 있는 정보는 2차 가입국보다 제한적이다.

애셜론의 정보 수집 본부는 영국의 요크셔 메니데일에 있지만, 애셜론을 운용하는 주 기관은 미국의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이다. NSA가 애셜론을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엄청난 운용 비용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애셜론이 수집해 내는 엄청난 자료의 양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전산 장비와 수학자, 분석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집은 영국 본부에서, 분석은 미국 메릴랜드의 NSA 본부에서 진행하게 된다. 이 괴물을 운용하는 미국의 NSA 역시 괴물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공산주의자들이 벌벌떠는 CIA가 2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NSA는 알려진 것만 3만 8천여명이다.

애셜론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감청을 하다보니, 하루에 수집되는 정보는 30억개 정도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중의 하나라인 미 의회 도서관의 10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영국에서 수집된 정보는 미국 NSA의 본부로 보내지고 수퍼컴퓨터에 의해 필터링이 된다. 그 후 수천명의 석사급 이상 수학자와 분석가가 달라 붙어 분석을 하게 된다. 만약 [폭탄]이란 키워드를 지정해 놓는다면, 수집되는 모든 정보 중에 [폭탄]이란 단어가 들어간 모든 정보는 별도의 절차를 통해 분석하게 된다.

그 분석 과정에서 엄청난 전산 장비와 분석가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CIA가 정보원이나 공작원에 의해 주로 의지하는 ‘인간’ 기반의 조직이었다면 애셜론과 NSA는 최첨단 IT 기술과 분석에 의존하는 의존하는 괴물인 것이다. 그 괴물이 2시간 전 ‘항상 감청 대상’인 Peter 경의 통화에서 Project Kairos라는 단어와 뉴질랜드를 잡아낸 것이었다. 발신지는 태국의 푸켓, 그리고 그 동일한 전화는 뉴질랜드 집권 여당의 차기 대표 Alex 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1시간 전에 토요일이 됐다. Justin은 황금 같은 금요일 밤을 사무실에서 보고서나 검토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한심스러운 상황에서도 이 보고서가 작전국 Global Issue 팀장인 자신에게 올라온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중이었다. Peter 백작이 ‘항시 감청 대상’ 이긴 했지만 영국인이기에 MI5 소관인데, 이 보고서는 MI5는 물론 MI6에 소속된 자신에게도 왔다.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NSA의 수 많은 분석가가 이유가 있으니 자신에게 보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Justin은 24살에 영국내를 담당하는 MI5에 입사하여 8년전에는 해외를 담당하는 MI6로 왔으니, 총 14년을 MI와 함께 보냈다. 그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할 일은 다 하고, 챙길 것 또한 잘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그것이 Justin의 능력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장악해서 본인에게 유리하게 몰아가는 것. 어찌보면 그런 상황 대처 능력으로 지금까지 인정받으며 3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이 은밀하고 복잡한 MI6 작전국 Global Issue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MI5와 MI6는 다른 국가의 정보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기 그지 없고 은밀하기 짝이 없으며 냉전 시대를 거치며 본인들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조직을 개편해 왔다. MI의 전신은 SIS로 100년전인 1909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육군성 하의 특무국 Secret Service Bureau의 해외과(Foreign Section)에서 출발. 그 후 해군성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육군성에 이관되어 육군정보국(Directorate Of Military Intelligence ) 소속으로 개편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외무성 (Foreign Office)관할로 이동. 1차 대전 후 정보 기관 체제 활동에 대한 전반적 검토를 실시한 비밀기관/특무기관 위원회 Secret Service Committee에서 정보활동과 임무 부여 활동 조정에 대해 면밀한 심사가 이루어져 국가적 차원의 정보기관으로 정비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40년대에는 P4 중동통제관, 영국본토통제관등의 조직을, 50년대에는 냉정시대를 감안하여 태평양, 극동, 중동에 소련을 끼워넣어서, 60년대 70년대에는 업무별로, 90년대 이후에는 지역별 업부별 복합적으로. 신이 아닌 이상 MI의 조직 변천사와 조직 구성 및 업무 보고 체계를 제대로 아는 이는 없을 거라고 Justin은 항상 이야기했다. 본인도 몰랐다.


Justin은 보고서를 다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Peter에 대한 여러 정보를 머리속에서 퍼즐 맞추듯 끼어 넣기 시작했다. Peter Devon 백작은 영국의 뿌리 깊은 귀족 가문인 Devon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전세계의 좋은 것이란 것은 다 누리고 자라왔다. Devon 가문은 16세기 잉글랜드 시절부터 내려오는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가문이었다. 이렇게 휘황찬란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Peter 백작은 MI 요주의 인물이었다. 재산 은닉, 정치인 및 기업인과의 결탁, 세금 포탈, 해외 여러 나라의 주요 인물들과의 뒷거래 등 MI5가 군침을 잔뜩 흘리는 내용들이었지만, 문제는 뒤를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가문의 후광과 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함부로 덤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MI5는 더운 여름 날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딱 붙어서 기다릴 것이다. Justin을 그걸 알고 있었다. Peter의 감청 내용이 해외 주요 인물들과의 뒷거래를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바라는 MI5의 작은 희망이 이 보고서에 살포시 얹어져서 MI6 작전국 Global Issue팀장인 자신에게 보내진 것이다.

‘Project Kairos’ 카이로스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어떤 시간이 Kairos 인 것이다. 작전명인듯 한데 도대체 Peter는 무슨 작전을 세우고 있으며 무슨 때를 말하는 걸까? 이 때가 되면 무엇이 어떻게 된단 말인가. 그리고 남태평양의 조그맣고 조용한 나라, 뉴질랜드가 언급된 이유는 뭘까? 역시 그냥 다른 30억개의 정보처럼 의미 없는 농담 아닐까? Justin은 노트북으로 몇 가지 자료를 더 찾아봤다. Peter와 Alex는 말레이시아 총리 취임식으로 인해 목요일과 금요일에 말레이시아에 있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푸켓에서 둘에게 전화가 간다. Justin은 전화기를 들고 팀원 중 Kate를 찾았다. Kate는 Justin이 가장 신뢰하는 팀원 중 한명으로 마침 오늘 같이 당직을 하고 있었다.
응, 난데, 그 마지막 보고서말이야, 발신인의 장소를 알아봐바. 응. 기다릴게” Justin은 금방 찾을거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끊지않고 기다렸다.
응? 고급 별장 같다고? 그럼 그 날 저녁 그 별장으로 걸려온 모든 전화와 그 안의 모바일로 온 전화까지 다 찾아서 프린트 해서 갖다줘. 응. 고마워.”


4분쯤 되자 똑똑, 케이트가 프린트 한장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Justin은 프린트를 받기도 전에 저 종이에는 한 통의 전화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랬다. 금요일에는 한통의 전화도 없었고, 토요일 아침 7시경 전화가 왔다. 전화는 말레이시아 KL의 한 공중전화였다. 특이한 사항은 그는 그냥 푸켓으로 전화를 한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전화를 해서 미국에서 다시 푸켓으로 전화를 하는 CallBack 시스템을 사용했다. 90년대까지는 전화 추적을 피하는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낙후된 기술이라 응급시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이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나름 은밀한 방법을 사용해서 전화를 한 사람은 푸켓으로 전화를 걸었고, 푸켓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은 곧 아침 7시가 채 되기도 전에 전용기에 있는 Peter에게, 그리고 바로 뉴질랜드 집권당의 차기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의미 없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물들이다. 푸켓에 있던 사람은 누굴까?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 Kairos, 요주의 인물 Peter, CallBack 시스템을 이용해 전화를 한 사람, 뉴질랜드 중요 정치인.  뭔가 있다. 모르겠지만 있다! Justin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난데, Peter와 뉴질랜드 Works 당의 차기 대표 Alex의 지난 일주일간 행적을 조사해서 아침까지 가져다 주고, 아~ 그리고 오늘 중에 뉴질랜드로 가는 비행기 좀 잡아줘. ” 뜬금없는 뉴질랜드 정치인의 행적과 뉴질랜드행에 케이트는 놀라는 눈치였으나, 짧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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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TAG MI6, 거래, 런던

이미 3회까지 올렸지만, 지금 저의 첫 소설 [거래]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닥치는대로 읽어대며, 사상과 정보, 지식들을 빨아들이던 저는 지난 수요일 뉴린의 라이브러리에서 20권 정도의 한국책을 발견합니다. 너무도 의외였고, 반가웠지요.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모레"로 유명한 ( 제가 정말 좋아하던 소설 ) 작가 앨런 폴섬의 그나마 최신작 [추방]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으나, 예전 '모레'를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뭐랄까 치밀하고 재미있지만, 우리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었지요. 역시 미국 소설의 번역판일뿐이니깐요....

라이브러리 앞에서 담배를 피던 저는 그래 직접 써보자. 라는 생각을 감히 하게 됩니다. 예전부터 글을 끌적여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써 본적은 없었기에 불안했지만,
 내가 6년 이상을 산 나라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2년 동안 지겹도록 돌아다닌 "말레이시아/싱가포르/태국"을 곁들인다면, 나름 스케일이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
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겁대가리도 없이 시작을 합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요일 오후 - 뉴린 라이브러리 앞에서 담배 피며 테마를 잡음. 라이브러리 안에서 A4에 대충 그려봄.
금요일 저녁 - 삼겹살을 먹고 개요표 작성 시작. 전체 1/3 정도의 시놉시스를 완성.
토요일 오전 - 시놉시스 85% 완성
토요일 저녁 - 시놉시스 97% 완성, 각 챕터마다 초벌 집필/메모 해 놓고, 몇 개의 챕터 완성.
일요일 종일 - 전체 20개의 챕터 중에 10개 완성 , 몇몇 커뮤니티에 1-3회를 올려 반응을 살피기 시작.

글판(glpan.com)에 1,2회를 올려보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조회수가 4밖에 나오지 않고 , (사이트 자체가 썰렁)
조아라(joara.com)에 1,2회를 올린지 한시간만에 "흥미롭다"는 코멘트가 붙습니다.


나름 수정에 수정을 가하면서 시놉시스 상 에러나 어거지가 없이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을 쓰면서 세운 기준은 "정교하게" "생생한 묘사" "놓치지 않는 호흡" "xxx 요건 비밀입니다." 였습니다. 지금도 이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주절 주절 길어졌네요. 첫 작품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하면,

태국-말레이시아 국경을 육로로 넘던 성빈은 검은색 알마니 정장을 입은 남자와 모바일이 바뀌게 된다. 그 순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숨 돌릴 틈도 없는 추적이 시작된다.

한편, 전세계 감청시스템 애셜론에 영국의 Peter 백작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잡히게 되고"Project Kairos"에 의구심을 가진 영국 정보부 MI6의 Justin 역시 뉴질랜드로 향하는데...

영국귀족, 뉴질랜드 거물 정치인, 기업인, 영국정보부 MI6, 뉴질랜드정보부 NZSIS 를 둘러싼 음모와 그 음모의 한 가운데 빠진 성빈과 혜원.

또, 태국 - 말레이시아 -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 - 오클랜드의 아름다운 Viaduct와 뉴린 쇼핑몰, 유명한 관광 도시 로토루아 및 수도 웰링턴까지의 여정이 4박 5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긴박하고 치밀하게 펼쳐진다.

저자는 실제로 12년째 IT Business를 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싱가폴/태국에서 2년, 뉴질랜드 6년을 살며
직접 보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배경 묘사와 사건의 시간을 구성한다.


처녀작이니만큼 많이 부족할겁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도 도움, 날까로운 지적 부탁드립니다.

우울한 뉴질랜드의 하늘 아래서 .
2008년 11월 어느 날 .

Philosop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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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푸켓 - 11 22일 토 7:00am


마하트리 총리의 뒤를 이은 압둘라 바다위의 취임식 및 파티는 타 국가의 행정 수반의 교체되는 과정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마하트리 총리는 자그마치 22년이나 말레시이아의 총리였다. 부총리에서 총리 자리를 넘겨 받은 마하트리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2년전의 말레이시아는 천연 자원이 풍부하지만 원숭이와 사람이 정글에서 같이 뛰어놀 정도로 개발 안된 지역이 많았다. 그는 동방(특히 일본,한국)을 보고 배우자라고 외치며 20년짜리 국가 개발 장기 계획을 세웠다. 5년 단위로 나눠진 그 계획들은 착실히 시행되었다. 풍부한 천연 자원으로 경제 개발을 위한 총알을 마련했고, 국교인 이슬람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자본을 유치했다. 동양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 Mid Valley Mega Mall을 세웠고, Bukit Bintan Golden Triangle에는 헐리우드 스타들이 모여 만든 전세계 프렌차이즈 레스토랑 Planet Hollywood와 수 많은 명품 매장이 들어섰으며, 신도시를 마구 넓어져갔다. 전국에는 정차할 필요 없이 적외선 장비로 톨게이트 비용을 낼 수 고속도로가 깔렸으며, KL에서 남쪽으로 20km 지점의 방대한 땅을 통째로 갈아 엎어 행정 수도 Putra Jaya 와 완벽한 IT Infrastructure 가 준비된 Cyber Jaya를 만들었다. Cyber Jaya에는 전세계의 IT 기업들의 연구소와 지사를 법인세 감면이란 당근으로 불러들였다.

대부분의 경제력을 중국계 국민에게 빼앗겨 억압받던 순수 말레이시아 계통의 국민들이 일으킨 1969년 폭동(이것은 미국 LA 흑인 폭동이상이었다)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현지인 우대 정책인 Bumi Putra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마하트리는 장기발전계획과 5차 말레이시아 계획을 성공리에 마무리 한 후, 1991 Vision 2020라는 말레이시아 내의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의 갈등 극복, 부의 분배, 일차산업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2 3차 산업으로 진입하기 위한 원대한 목표를 발표한다. 지금도 Vision 2020은 성공적으로 굴러가고 있다. 마하트리는 22년간 말레이시아의 모든 것을 뜯어 고쳤다. 그리고 22년전 자신이 권력을 이양받았듯이 부총리 압둘라 바다위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물러나는 것이었다. 4년마다 선거를 통해 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타 국가의 행정 수반과는 역사와 여파가 다른 것이었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바다위의 총리 취임식은 거대하게 행해졌다. 각국의 수 많은 주요 인물들이 초대되었으며, 취임식과 취임 파티는 거의 OECD 정례 회의 수준의 규모였다. 그 수 많은 외국 정부 관련 인물 및 유명 인사들 속에는 영국의 Peter 백작과 뉴질랜드 직권 여당 Works당의 차기 대표 Alex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요일 취임 파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Peter Alex 21일 금요일 오후 극비리에 태국의 Puket으로 향한다. 거래의 마지막 세부 사항을 점검하고 보고하기 위해 기다리는 Tim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Tim Vincent에게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6시가 좀 안되서였다. 어제 오후에는 Peter 백작과 Alex 차기 대표와 아주 흡족한 미팅을 했다. 회담은 거의 Tim이 주도했고, Peter 백작과 Alex 차기 대표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Tim은 너무 기뻤다. 지난 석달간의 진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이제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지지도 분석 자료는 완벽했으며, 매수/매도 계획도 확실했다. 모든 송금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쯤 지구를 한바퀴쯤 돌고 있을 것이었다. 완벽했다.

모두들 들떴다. Peter 백작은 지난 날의 화려한 과거를 지속할 수 있다는 환상에, Alex는 자신에게 다가올 엄청난 권력과 부에, Tim은 자신에게 할당될 막대한 자금에. Tim은 너무 신나 빨리 회담을 끝내고 비싼 술들과 맛난 음식, 그리고 옆 방에서 기다리는 열 명의 맛사지 걸들을 부르고 싶었다. 회담은 1시간 만에 모두에게 희망을 주며 끝났고, 두어시간 비싼 술과 음식을 만끽한 후 Peter Alex는 각각 먼저 돌아갈 것이다. 열 명의 마사지걸은 다 Tim에게 남겨질 것이다. Tim은 역시 너무 기뻤다.

 

회담 후 빈센트는 모든 자료를 잘 정리하여 SD 메모리 카드에 안전하게 담았다. 이제 그는 그 SD 카드를 자신의 모바일에 삽입하여 말레이시아를 거쳐 뉴질랜드로 갈 것이다. 누가 보아도 최신 모바일 SAMSUNG i780에 사진 저장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SD 카드를 넣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빈센트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절도가 넘쳐났다. 시계의 분침과 전투용 나이프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Vincent는 아마 태어날때도 분만 예정 시간에 맞춰 칼 같이 태어났으리라. 담배도, 술도 하지 않는 빈센트는 회담이 끝나자 마자 말레이시아와의 국경 도시 핫야이까지 차로 이동한 후, 일반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말레이시아로 들어갈 것이다. 그 과정은 지극히 평범하여 문제가 있을 여지가 없다.

그런데 술도 안 깨는 이 아침에 전화를 해서는 SD 카드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아니 강탈당했다고 했다. 아니 누가 강탈을 한단 말인가? 누군가가 이 거래를 파악하고 자료를 훔쳐냈다는건가? 아니다. 그럴 일이 없다. 지금까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일 처리를 해 오는 자신 아닌가. 더욱이 영국의 귀족과 뉴질랜드 집권당의 차기 대표, 파이낸스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자신.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3명이 자연스럽게 말레이시아에 왔고, 극비리에 태국의 푸켓으로 와서 3자 회담을 했다. 외부에서 눈치를 챘을 리는 없다. 그런 도대체 누구에게 강탈!을 당했다는 건가? 단순히 동네 양아치가 빈센트를 돈 많은 외국인으로 보고 지갑이나 모바일을 훔쳐간 것일까? 그래. 그럴 확률이 높다. 분명 빈센트도 강탈당했다고 했다. 우연찮게 소매치기나 강도를 당했을 것이다. 빈센트의 능력이면 한번에 몇 명이 덤볐건 모두 모가지를 부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시끄러워 지거나 본인의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을 테니,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일단 그냥 보내고 추적중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럴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Tim은 마음이 놓였다.

Tim
이 일어나기 위해 침대의 이불을 확 걷자 어제밤에 마사지를 하던 태국 여자 2명이 곯아 떨어져 있었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이 둘을 깨워서 즐거운 시간을 다시 가져야지하며 커피를 끓이던 Tim에게 다시 Vincent의 마지막 말이 떠 올랐다. 어제 입국해서 오늘 출국하는 녹색 여권을 가진 동양놈이라. 아마도 중국계 놈한테 모바일을 탈취당했을거야. 쿡쿡쿡. 이 탈취 사건이 Project Kairos 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순 소매치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마구 좋아졌다. 아침 7. 뉴질랜드는 이미 오전 11시일 것이다. Tim은 어제 푸켓에서 구매한 Prepaid SIM 카드를 자신의 모바일에 넣고 Alex에게 상황을 보고 하고 21일 입국하여 22일 출국하는 녹색 여권의 동양 남자를 추적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Peter 백작에게도 전화를 했다.

“Project Kairos
에 조그마한 변동 사항 발생. 큰 문제는 없음. 뉴질랜드로 곧 돌아갈 예정그리고 전혀 큰 일 아니라고 껄걸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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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거래, 소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 룸푸르, 푸두라야 버스터미널 -

11월 22일 토 6:00am

일년 내내 푹푹 찌는 말레이시아의 아침 6시는 대낮처럼 환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수도 Kuala Lumpur 시내 한 복판에 있으며, 바로 길 건너에는 KL에서 가장 좁은 길에서 가장 많은 제품을 팔아치우는 China Town이 있는 그 곳에 바로 KL 최대의 Puduraya 버스 터미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백대의 버스가 지하의 플랫폼으로는 들락날락하고, 1층에는 표를 구매하려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2층에는 24시간 오만가지 음식을 파는 푸드코트가 있는 곳. 성빈은 여길 올 때마다 땀 냄새에 인상을 쓰지만,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한국으로 치면 종로 2가 사거리 옆에 남부 버스 터미널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성빈은 15분 전 도착하여 Nasi Lemak (말레이시아식 주먹밥) 으로 아침을 떼우고 있었다. 이제 이걸 먹고 차이나타운에서 진품과도 구분 못할 정도로 정교한 가짜를 사서 KL Central 에서 KLIA(쿠알라 룸푸르 국제 공항)까지 넌스톱으로 기차를 탈 생각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가면 사랑하는 혜원이 기다리고 있을 터, 차이나타운에서 산 가짜를 진짜라고 말해도 믿을 것이다. 어차피 전문가들도 구분 못하는 정교한 제품아닌가. 큭큭 그런 생각으로 웃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순간적으로 성빈의 오른쪽 팔을 뒤로 꺾었다.

왼손으로는 뒷머리를 잡아 고개를 뒤로 젖힌채, 한쪽으로 밀고 가는 것 아닌가. 얼굴을 볼 수 없는 뒤 사람은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빈을 계속 한 쪽 구석으로 밀고 갔다. 정의심 강한 한국이라면 누군가가 나서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줄텐데, 신고 정신 강한 캐나다라면 누군가가 신고라도 해 줄텐데, 제길 여긴 말레이시아 아닌가. 내가 이 자리에서 칼을 맞아도 아마 아무도 경찰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른팔과 머리가 뒤로 제껴진 상황에서 성빈이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밖에 없었다. 가던 방향을 생각한 성빈은 저 방향이 화장실인 것을 알았다. 쿡쿡 성빈은 속으로 웃었다. 말레이시아의 공중 화장실은 돈을 받는다. 푸하하하. 터미널 안의 화장실, 대형 쇼핑몰 안의 화장실까지도 50센트에서 1링깃을 받는다. 뒤에 있는 것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오른팔로는 내 팔을 꺾고 왼 팔로는 내 뒷머리를 움켜 잡은채 , 화장실 앞에서 어쩔 것인가. 성빈은 어깨의 아픔보다 점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야했다.

남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나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꺾어지니 화장실 앞에 책상을 하나 놓고 앉아서는 웬 할아버지가 자기를 가로 막고 있는게 아닌가.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 할아버는 그 남자가 웬 남자를 거의 납치 수준의 자세로 끌고 가고 있는 것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2명이니 40센트를 내라고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화장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당 20센트를 내야 한다고 설명까지 곁들인다. 그 남자는 이 상황이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할아버지를 걷어찰까도 생각했지만, 바로 옆에서 대걸레를 밀고 있는 또 다른 할머니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맘에 안 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때려 눕히고 한 남자를 납치하듯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면 시끄러워질터였다. 순간을 고민하던 남자, 성빈이 지금까지 얌전히 따라 온 것을 생각해 내고는 성빈의 귀에 조용히 말했다.

“ Listen. Carefully “ 그건 네이티브 엑센트였다. 그렇지만 미국 발음처럼 저속적으로 가볍지도 않았고, 영국처럼 딱딱하지도 않았다. 남자가 성빈의 귀 가까이 조용히 그 말을 할 때, 성빈은 자유로웠던 왼 손을 이용해서 남자의 안면을 가격했다. 지금까지는 멀어서 왼 손으로 어찌 할 수가 없었지만, 내 귀에 속삭일 정도로 내 얼굴과 가까운데 무엇이 문제랴. 왼 손을 펴서 상대방은 두 눈과 코 부분을 가격하는 순간, 왼 손 검지가 상대방의 눈을 살짝 찌른 것이 느껴졌다. 순간 기습을 당한 남자의 오른팔에서 힘이 빠지자 성빈은 몸을 오른쪽으로 빼내며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목을 가격했다. 남자는 왼 손으로는 눈을, 오른손으로는 목을 감싸 쥐고는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객을 숙이자 그의 목 뒤에서 예의 그 알마니 로고가 보였다. 입국할 때 본 그 남자가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제는 내가 가해자가 된 상황아닌가. 그것도 말레이시아 현지의 할아버지 , 할머니 앞에서.

성빈은 터미널 건물의 왼쪽 모퉁이를 돌아 나와 길을 건너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갔다. 차이나타운이 끝나기 전 있는 왼편의 샛길로 나오자 다시 그 터미널의 뒷편이 보였다.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터미널 뒤 쪽에 있는 Puduraya 전철역으로 간 성빈은 이제 전철을 타고는 KL Central 로 가서 공항으로 갈 거다. 그럼 이 남자도 다시 볼 일 없다.  

Vincent는 말레이시아의 공중 화장을 저주했다. 이 버스터미널의 넘치는 인파도 저주했다. 자신을 공격하고 도망간 동양인 남자도 저주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을 때 정장을 벗고 모바일을 꺼내 놓은 자신을 가장 많이 저주했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도장을 고치고, 버스에 탄 후 10분쯤 지나서였다. 아직 푸켓에 있을 Tim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모바일을 꺼낸 빈센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침 방금전에 공장에서 출시된듯한 광택이 번쩍이는 새 제품 SAMSUNG i780이었다. 불길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다. 전화번호에는 아무 번호도 없다. Txt, email 아무것도 없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 한 장 없으며, 심지어 SD Memory 란도 비어있다. !!! 입국 수속 사무소에서 그 옆의 동양놈과 모바일이 바뀐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모바일이고 그래서 책상 위에 올려 놓았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모바일을 잡으려고만 했으면 손목을 분질러 버릴 생각이었다. 근데 어디서 모바일이 그 동양놈과 바뀐거란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일어나서 모바일을 움켜쥐려는 순간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 순간에 입국사무소 직원놈이 움직여서 책상위의 서류들이 밀리는 것을 언뜻 본 기억이 난다. 버스는 논스톱으로 KL을 향해 달리고 있고, 지금은 밤 12시다. KL까지는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밀림 수준이다. 그 놈도 KL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를 내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내린다면 정말 밀림에 갇힌 타잔처럼 될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래! 어차피 그 동양 사내놈도 KL의 Puduraya 버스 터미널로 갈 것이다. 비슷한 시각에 도착할테니,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놈은 분명 내게 내일 출국한다고 했다. 일단 Tim에게 보고한 후에, 팀을 꾸리면 어제 입국해서 내일 출국한 동양인 리스트 정도는 구할 수 있다. 그 놈 여권은 녹색이었지. 녹색 여권을 가진 나라로 추리고 나면 일은 더 쉬워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 맘이 좀 편해졌다.


빈센트가 탄 버스는 성빈과 거의 같은 시간에 Puduraya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 복잡한 곳에서 성빈을 찾을 일이 걱정이었는데, 그 놈이 저 앞에 서서 주먹밥을 어그적 어그적 먹고 있는게 아닌가. 뒤따를까 하다, 이 복잡한 인파속에서 놓칠수도 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도 몰랐다. 과감한 행동력이 필요할 때였다. 빈센트는 소리 없이 다가가 그의 오른팔과 뒷 머리칼을 순식간에 잡아 챘다. 모바일이 바뀌는 바람에 꼬이는듯 했지만, 그 동양놈을 금방 발견해서 기분이 좋았다. 화장실로 끌고 가, 모바일을 돌려 받으면 그뿐이었다.

빈센트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 놈의 모바일을 돌려줘야지 까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빌어먹을 화장실 입장료 때문에 그 놈이 도망을 간 것이다. 그는 또 터져 나오는 욕을 참았다. 도청을 방지하는 자신의 모바일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미국의 CallBack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띠디디 띠디디 두 번이 울리고는 찰칵 소리 후에 다시 번호를 눌러 달라는 삐-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상태에서 그대로 다시 태국에 있는 Tim 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은 상황을 알려야 했다.

“Project Kairos에 문제 발생. SD탈취. 21일 입국하여 22일 출국하는 녹색 여권을 소지한 모든 동양 남자의 행방을 확보 바람. AK에 백업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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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말레이시아 국경 도시 핫야이 - 11월 21일 금 10:30pm

그와 모바일이 바뀐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정말 너무도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에 누구도 눈꼽만큼의 의심할 수가 없었다. 태국-말레이시아 국경을 8번째 넘는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성빈은 푸켓에서 2박 3일 동안 바닷가와 저렴한 맥주를 실컷 즐기고 이제 핫야이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넘어가 바로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이번이 8번째군” 24명만 태울 수 있는 버스의 넓직한 창가 좌석에 앉은 성빈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 성빈은 7번이나 태국을 다녀왔다. 몇해전 말레이시아에서 2년여를 체류하며 태국을 7번이나 다녀온 것이다. 그는 태국에 넘쳐나는 가지각색의 관광객들이 좋았고, 저렴한 맥주가 좋았고, 이쁜 태국 여자들도 좋았다. (단, 이쁜 여자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증오했다.) 그 중 3번은 싱가폴-말레이시아-태국을 경유하는 저가 항공사인 Air Aisa 를 이용해서 다녀왔고, 4번은 말레이시아의 푸두라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태국 최남단 도시 핫야이, 그리고 핫야이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방콕까지 가는 육로를 이용했었다. Air Asia의 비행기가 편하고 빠르기는 하지만, 작은 사이즈의 비행기가 웬지 불안해 보였고, 무엇보다 중간 중간 쉬어가며 이것 저것 맛 볼 수 있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어 성빈은 웬만하면 육로를 이용했다. 육로로 말레이시아-태국 국경을 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그는 항상 주변에 여행객들에게 추천하고는 했다.

특히 성빈이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서는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한국에서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비무장지대에서 총에 맞거나, 운이 좋아 총을 맞지 않는다면 지뢰를 밟게 된다는 의미였다. 정말 운과 능력이 좋아 그것도 이겨내고 북위 38도에 있는 국경을 넘었다면, 월북해버린 빨갱이로 몰려 사돈의 팔촌까지 국정원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쿡. 그런 생각을 하자 성빈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내리며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역시 그에게 특이한 기분을 전해줬다. 어쨌든 이번은 그의 5번째 걸어서 국경 넘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핫야이를 떠난 버스는 출국사무소에 도착했다. 이미 10대 정도의 버스들이 심사를 받고 있었다. 이 뒤로도 버스들이 줄줄이 들어올테다. 핫야이에서 말레이시아로 출발하는 대부분의 버스는 10시에서 12시에 출발하니, 지금이 나름 러시아워인 셈이다. 더욱이 금요일 밤 아닌가.

출국사무소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버스가 출국사무소에 도착하면, 버스의 타고 있는 사람들이 우루루 내린다. 대부분의 큰 짐은 버스에 그냥 남긴채 소지품만을 소지하고 출국 수속을 밟는다. 미국처럼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되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는 법도 없다. 사람들이 내리면 버스는 저 쪽의 넓은 버스 주차장으로 가서 마약 단속을 위한 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해줄터였다. 그 사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앞에 있는 초소( 정말 그것은 초소였다. 가로 세로 1미터의 상자 안에는 출국사무소 직원이 그 날의 날짜가 적힌 도장을 하나 가지고 있으며, 머리 하나도 안 들어갈만한 창문이 있는) 에 여권을 밀어 넣으며 Hi 를 한번 날려주면, 출국 도장을 쾅! 찍어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옆에 단층으로 된 사무실이 있지만, 여기서 마약소지나 불법체류로 체포되지 않는다면 저 건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버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도장을 받으면 잘 확인해야 한다. 가끔 나이 많은 직원들이 날짜를 오늘로 맞추지 않아 어제 , 때로는 한달전 날짜가 찍히기도 했다. 성빈도 두번째 출국 때 당해보았다. 그래서 날짜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곧 버스는 왔고, 24명의 사람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5분쯤 가자 , 이번에는 말레이시아 입국 사무소가 나왔다. 데자뷰였다. 태국 출국사무소와 비슷한 크기의 넓이에 , 똑같이 버스 주차장이 있고, 똑같이 4개의 초소! , 그리고 똑같이 책상이 5개쯤 들어있는 단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태국에서는 히브리어나 아랍어와 비슷한 태국말 대신 한국의 초등학생이 보면 깔깔대고 웃을법한 말레이시아식 영어가 써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KOPI(coffee) 같은 ... 4개의 초소 중 한 초소는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여기서의 외국인은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의미다, 국적 따위야 아무려면 어떠랴)이 줄을 서게끔 되어 있고, 나머지 3개의 초소에는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기타 등등, 백인도 아니고, 동양인도 아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어차피 육로로 국경을 넘는건 극소수의 돈 있는 배낭여행객과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니. 성빈은 이것이 불평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저 쪽 초소의 긴 줄에 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성빈이 외국인을 위한 초소로 가자 앞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급 세무인지, 비단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 아무튼 고급스럽기 그지 없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막 여권을 초소에 밀어 넣고 있었다. 186 정도의 키에, 눈이 부실 정도로 짧지만 밝은 금발, 떡 벌어진 어깨. 분명 북유럽 사내일거라고 성빈은 생각했다. 짐이라고는 007 가방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만, 버스 안에 얼마나 짐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을터. 곧 그 남자는 여권을 받아들고, 성빈 차례였다. 나이가 90살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성빈을 흘긋 보더니 이내 도장을 찍었다. 나이가 저렇게 많아 보이지만, 고생때문이라고 성빈은 생각했다. 아마 마흔 중반일 것이다.

습관처럼 여권의 날짜를 확인한 성빈은 순간 짜증이 났다. 21 Nov 라고 찍혀있어야 할 곳에는 21 May 라는 도장이 버젓이 찍혀 있었다. 아~ 저 할아버지. 내일이면 말레이시아를 출국해야 하는데. 다음 사람을 제치고 초소의 머리통 하나도 안 들어갈 창문에 얼굴을 쑤셔 박고는 여권의 날짜가 잘못됐다고 하니 저 옆의 건물로 가서 말하란다. 결국 저 책상 5개의 건물에 들어가 보는군. 건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바로 앞에서 도장을 받은 금발의 남자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날짜 확인을 안 했나 보다. 성빈은 자비심을 베풀어 그에게 걸어가서 이야기를 했다. 여권에 날짜가 잘못 찍혔다. 나중에 구찮은 일이 생길수도 있으니, 해결하는 게 좋다. 나도 내일 출국을 해야 해서 지금 사무실로 가서 도장을 다시 받을거다. 같이 가서 해결하자. 남자는 그 비싸보이는 검은색 정장의 안 주머니에서 여권을 보고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말없이 성빈과 함께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5개의 책상 중에 사람이 앉을 수 있어 보이는 책상은 2개였고, 성빈과 그 남자는 그 책상에 앉았다.

찌는 듯이 더운 말레이시아의 날씨는 전혀 새롭지 않거만 그 사무실 안은 더욱 더 더웠다. 남자는 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성빈은 얼핏 보았다. 목 부분에 있는 Armani 마크를. 분명 비쌀 터였다. 웃옷을 벗느라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모바일을 꺼내 책상에 올렸다. 그와 동시 성빈도 시간을 확인하느라 자신의 모바일 SAMSUNG i780 모바일을 꺼내 책상에 놓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이지만, 말레이시아/태국/뉴질랜드 등 GSM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난주 태국에 가기 전, 싱가포르에서 구매한 것이다. 알마니 정장 남자는 성빈쪽으로 책상 끝자락에 모바일을 놓았고, 성빈은 알마니 정장 남자쪽으로 책상 끝에 모바일을 놓았다. 사실 둘 모두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책 상위의 산더미 같은 서류들 때문에 공간이 거기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똑 같은 모바일이 10cm 거리에 있었다. 먼저 도장을 고쳐 받은 알마니 남자가 일어섰다. 오른손으로는 가방을 잡으며 왼손으로는 모바일을 잡는 순간이었다. 성빈의 도장을 고쳐주기 위해 이쪽으로 오던 남자가 책상에 있는 서류를 몸으로 밀자, 수 많은 서류들이 밀렸고, 그 덕에 성빈의 모바일이 그 남자의 모바일 위치까지 밀려가는 순간 가방쪽을 바라보던 남자는 자연스레 성빈의 모바일을 잡고 말았다. 그 남자의 자신이 바라본 위치에서 모바일을 잡아서인지 전혀 의구심 없이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 자신을 기다리는 버스로 갔다. 곧 도장을 고쳐 받은 성빈도 하나 남은 모바일을 들고는 나가 곧 버스에 올랐다. 이제 버스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KL(쿠알라 룸푸르)까지 달릴 것이다. 밤 11시가 넘었다. 자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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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