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린 쇼핑몰 근처  - 11월 24일 월 9:48am


저스틴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역시 성빈이나 혜원과 만나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혜원의 모바일 번호는 알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 혜원의 모바일의 위치가 마지막으로 GPS에 잡힌 것이 뉴린이라서 아침에 뉴린까지 오긴 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차 앞 유리를 보며 한 숨을 쉬는 순간 그 차가 미친듯이 자신의 눈 앞을 지나갔다.
그 차였다. 공항에서 본 검은색 테리토리. 그리고 찰나였지만 그 피 냄새를 풍기는 남자의 눈이 부신 짧은 금발이 보였다.

저스틴은 노트북을 조수석으로 집어 던지고 시동은 건 후 도로로 나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맥도날드의 주차장의 일방통행을 무시하며 역주행하여 주차장을 나와 차도로 접어들었다. 3999cc V8 엔진을 얹은 홀덴사의 클럽 스포트는 역시 힘이 넘쳤다. 월요일 오전이라 차가 좀 있는 편이었지만, 런던의 지옥 같은 정체에 비하면 이건 독일의 아우토반이었다.

70미터쯤 앞에서는 가던 검은색 테리토리가 막 사거리로 진입하는 순간 사거리의 신호등은 주황색을 거쳐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저스틴이 사거리에 도착할때는 이미 자신의 눈 앞에서 가로로 차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아우토반 같던 그 길이 정체로 유명한 뉴욕보다도 한심해 보였다. 어차피 2~3분은 기다려야 할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혜원의 모바일로 전화를 했다. 제발 받아라. 제발 죽지마라. 띠디디디. 신호가 간다. 정확하게는 신호가 한번이 가기도 전에 전화기 저 편에서 네이티브로 보기엔 어렵지만, 어릴 때 이민 왔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만큼의 유창한 영어 엑센의 헬로우가 들려왔다.

혜원이었다. 제길. 뭐라고 해야하지. 내가 MI6라고 하면 믿을까? 피 냄새를 풍기는 저승사자가 당신에게서 피를 짜내기 위해 가고 있다고 말해줘야 하나. 일단 도망가라고 말해줄까?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있는 중에 혜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의 남자친구가 당신께서 어제 검은 정장의 사내들을 멈추게 만든 분인지를 묻습니다.
그렇소. 난 저스틴이라고 하네. 지금 당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네. 일단 나를 만나서 자세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말을 짤라먹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온다.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런 애송이들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다닐수는 없다.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보기관중의 하나며, MI6 작전국 Global Issue 팀의 리더아닌가.

“다시 묻겠습니다. 어디 소속입니까?”
“지금은 말해줄 수가 없네. 일단 만나면 내가..”
“그렇다면 저희도 할말이 없습니다”
찰칵.


이 놈들은 분명 여기가 자기네 안방이었다. 경찰도 신경 안쓰고 미친듯이 차를 몰고, 모텔 입구와 인도에 걸쳐 차를 주차한걸 보니, 교통신호고 법이고 다 무시하는게, 분명 여긴 저들의 안방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뉴질랜드 정부 관련 혹은 그에 필하는 백그라운드를 가진 놈들일것이라.

저스틴은 모텔 멀리 차를 대고 보니 그들도 이 깜찍한 동양 커플을 놓친듯 하다. 사거리에서 혜원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후, 파란 신호가 켜진지가 채 2분도 가기 전에 저 멀리 모텔 앞에 3대의 검은색 테리토리가 있는 것이 보여 저스틴은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금발의 피 냄새 사내와 몇 명의 검은 정장 사내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놓친듯 하다. 그럼 어디서 나의 전화를 받은 것일까? 이미 모텔을 빠져 나온 뒤 였을 것이다. 아직 이 주변에 있을텐데. 전화를 하지만 혜원의 전화는 꺼져있다. 애가 탔다. 저 평범한 애들을 살리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피터 백작과 관계 있는지 아닌지가 궁금했다. 아니라면 영국으로 돌아가는 첫 비행기를 잡아 타고 바로 가 버리고 싶었다. 근데 확인이 안된다.

이 평범한 애들은 MI6의 나 뿐 아니라 저 저승사자들까지 따돌리고 있다. 기가 막혔다. 이렇게 휘둘려야 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송이 같지 않은 애송이들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게 하는건지. MI6로 전화를 해서 다시 혜원의 모바일 위치를 추적하라고 말을 하기 위해 전화기를 잡는 순간이었다. 차 뒷문이 열리더니 혜원이 탔다.

성빈과 혜원은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입국 기록을 확인하여 자신의 신분을 확보했을거라는 것과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혜원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혜원의 신분을 확보했다면 사무실로 전화를 하거나 도청을 할테고 그렇다면 모텔로 쳐 들어오는 것은 곧 이리라. 그들은 오클랜드 시내 방향에서 올 확률이 높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뉴린을 지나쳐 오겠지.

그리고 어제 우리를 도와준 사내가 알마니 검은 정장과 한 패가 아니라면 알마니 검은 정장이 모텔을 급습하는 동안 모텔에 못 미쳐 차를 세우고 상황을 엿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는다면 알마니 정장을 피하는 것과 그 사내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성빈의 추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혜원은 차 문을 닫자 이내 그 유창한 영어로 일단 출발하자고 한다. 기가 막혔다. 또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룸미러를 통해 뒷자석에 앉은 혜원을 본다. 예쁜 얼굴이 애써 침착한 척을 하고 있다. 아마도 다리는 한 겨울의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으리라.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게 아쉬울 뿐이다.

주의를 끌지 않게 차를 출발해 주세요” 다시 말한다. 저스틴은 일단 출발을 한다. 10초쯤 지나자 아직도 모텔 앞에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검은 정장의 놈들이 보인다. 그 놈들을 지나쳐 차의 속도가 40Km쯤 되자 혜원이 조금 더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앞으로 우리는 10분 정도 대화를 하게 될 겁니다.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 그 다음에 또 좌회전. 그런식으로 사거리가 나올 때마다 좌회전을 해 주세요. 즉, 우리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10분간 대화를 할 겁니다. 차가 예정대로 계속 좌회전을 하지 않거나 , 제가 남자친구에게 연락하기로 한 시간에 연락을 하지 않으면 제 남자친구는 바로 제가 납치되었다는 전화를 경찰에 할 것이며, 홀덴사의 검은색 클럽 스포트, 차량번호 CAK229 차량 번호를 경찰에 알려줄겁니다. 뉴린의 경찰서는 여기서 2분 거리입니다. 3대의 경찰차가 이 차를 세우고 모든걸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시라고 믿습니다. 자~ 대화를 해보죠. 당신은 누굽니까?” 그 순간 저스틴은 깨달았다.

그 때 혜원의 전화가 켜져 있던 것은 의도적이었으며, 자신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 어쩌면 그들은 큰 위험을 감수했던 것이다. 모바일이 켜지면 위치가 추적당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듯 했다. 성빈이 기무사에 근무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내용이었다. 자신이 목숨이 위험하다고 알려주지 않았어도 이 애송이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스틴은 이미 자신이 이들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스틴 트로이, 영국 정보부 MI6입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첫번째 사거리가 나오자 저스틴은 묻지도 않고 얌전히 좌회전을 했다.
“우리를 쫒고 있는 저 검은색 정장들이 당신과 일행이 아닌 것은 압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나도 정말 모르네. 어떤 조직의 실행부대거나 이 나라 정보부일 것이라고 추측하네. 근데 성빈이란 자네 남자친구는 도대체 어쩌다가 저런 놈들의 추적을 받고 있는건가?”
라고 역습을 가하며 저스틴을 룸미러로 혜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실행부대라. 그 표현이 좋겠군요. 우리는 어떤 대규모 송금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 주식 분석에 대한 자료와 정치에 대한 자료도 가지고 있습니다. 몇가지 가설이 있지만 명확하게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저 실행부대가 그 메모리칩을 원한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차는 아직까지 혜원의 지시대로 계속 좌회전을 하고 있지만, 저스틴은 이제 분위기를 자기가 주도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자료를 넘기게. 내가 자네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그 자료가 당신에게 유용할지 안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저희의 안전을 보장한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만약 당신에게 유용한 자료가 아니라면 당신이 우리가 안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까요? 전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군요. 이제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
제길! 산전수전 다 겪고 MI6 에 14년을 근무한 내가 이렇게 휘둘리게 될 줄이야. 곧 자신이 차를 세우고 있던 맥도날드가 보였다.

“맥도날드를 지나 바로 우회전을 해주세요. 당신도 말레이시아에서 성빈을 따라 입국했습니까?”
“아니네. 난 영국에서 입국했네.”
“입국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스틴은 순간 고민이 됐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계 최대의 감청 시스템 애셜론이 평소 감시중이던 피터 백작의 전화를 도청했다고 순순히 자백을 해야하나. 그럴 순 없지.
“영국 정보부의 감시를 받던 한 저명인사가 받은 전화 때문이었네. 그 전화는 태국의 푸켓에서 걸려왔지. 그 정보를 따라 뉴질랜드로 입국했네”

차가 우회전을 하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스틴은 느꼈다. 우회전을 하면 곧 혜원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이 깜찍한 애송이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영국 주소, 영국 전화번호가 찍혀있는 MI6의 명함이었다. 신호가 바뀌어 차를 출발시키며 말 없이 명함을 뒤로 넘겼다. 우회전을 하자 차는 일차선으로 진입을 하였다.


도로의 좌측에 있는 뉴린 쇼핑몰에서는 인파가 몰려 나오고 있고, 우측에는 오클랜드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버스터미널인 뉴린 버스 터미날, 정면에는 뉴린 기차역. 복잡했다. 그리고 일차선인 차도는 좁았다. 차를 유턴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길을 다 지나고 나면 혜원이 쇼핑몰로 들어갔는지, 버스를 탔는지, 기차를 탔는지 모를 상황이었다. 성빈과 혜원의 상황 장악력은 탁월했다.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처음에 계속 좌회전을 시킨것도 쇼였다. 상황에 대한 제약을 걸지 않은 상태에서 10분간만 대화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 저스틴도 일단은 차를 한적한 곳으로 몰았을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혜원은 차를 계속 좌회전시켜 누군가가 이 차를 지켜보고 있다는 인식을 저스틴에게 심어줬으며, 이를 통해 안전하게 대화를 하고 원하는 장소(물론 이 복잡한 장소)에 내릴 것이다. 아마 그 10분 동안 성빈은 이동하여 이 근처 어디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한마디의 말로 확실하게 시간을 번 것이다.


역시 차는 얼마 가지 못해 복잡한 길로 인해 잠시 멈췄고, 뒷문이 열렸다. 혜원은 차에서 완전히 내린 후 몸을 숙여 저스틴을 보고 말했다.
“지난 10월, 영국내 28개의 은행에서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대규모 송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정치판 예상분석과 베로 보험회사 주식 매도매수 계획서가 저희에게 있습니다. 숙제를 드리죠. 거기에서 연관성을 찾아보세요. 저희가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언제일지는 모르겠군요. 보시다시피 계속 쫓기는 입장이라” 그리고는 차 문을 닫았다. 저스틴은 재빨리 그 내용들을 머리속으로 외웠다.


앞차는 이동을 했는데도, 저스틴의 차가 앞으로 가지 않자 뒤에서 빨리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저스틴이 차를 출발하며 왼쪽을 돌아보니 성빈과 혜원이 쇼핑몰 안에서 어깨동무를 하고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게 아닌가. 그 둘은 마치, ‘이제 숙제를 내 줬으니 집으로 가서 열심히 숙제를 한 후 내일 제 시간에 다 한 숙제를 꼭 챙겨서 등교를 하려무나’라고 하는 선생님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또 기가 막혔다. 저 둘을 MI6로 스카우트라도 하고 싶어졌다. 스카우트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백업팀이 필요했다. 혼자 활동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더군다나 여기는 내 안방인 영국도 아니지 않는가.


저스틴은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웃기다고 피식 웃으며 MI6의 케이트에게 전화를 했다.
“애쉴런을 풀가동하여 피터 백작과 뉴질랜드의 알렉스 덴버 주변을 모니터링할 것, 지난 10월 영국 내 은행들에서 버진 아일랜드로 송금된 내역을 파악할 것. 뉴질랜드의 베로 보험 회사의 주가를 분석하고, 이와 연계되는 영국 내 보험회사가 있는지 확인할 것. 특히 보험 회사와 피터 백작의 연계성을 집중 추적할 것. 뉴질랜드 Works 당의 차기 대표 알렉스에 대해 PBI 레벨 3로 집중 조사할 것. 그리고 자료분석팀, 감청팀, 경호팀, 작전지원팀을 지금 당장 조직하여 MI6 전용기 편으로 뉴질랜드로 파견할 것.“

정확하게는 모르나, 피터 백작과 알렉스 덴버 사이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 듯 하다. 성빈은 말레이시아에서 우연히 정보를 입수하게 되어 쫓기는 중인 것이다. 이제 영국의 MI6에서 이 자료들을 조사하면 뭔가가 드러날 것이다. 저스틴은 더 이상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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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hilosop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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