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ckland Viaduct – 11월 23일. 일 5:48 pm
이제서야 성빈은 좀 살 것 같았다. 공항에서 그 놈의 빌어먹을 알마니 정장 놈을 보고는 뒤도 안 보고 도망쳐 온 후에, 그대로 혜원이의 차를 타고 미션베이로 달렸다. 탱크탑인지 브래지어인지를 입고 인라인을 타는 젊은 여자들, 연인들, 아직 완연한 여름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굳굳히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키위 가족들을 보며, 성빈과 혜원은 그 틈에 섞여 혜원 얼굴의 반 만한, 미션베이의 유명한 햄버거 버거퓨어를 먹었다. 6개월 만에 만난 그 커플은 배가 터지게 큰 햄버거와 조선시대의 사약을 담아 건내주던 사발 같이 생긴 Bowl에 모카치노를 한잔씩 마신 후 , 맥주나 한 잔 할 생각으로 오클랜드 시내 다운타운의 Viaduct에 와 있었다.
Viaduct는 정말 오클랜드의 자랑 중의 하나였다.(실제로 비아덕트 입구에는 Pride of Auckland라는 커다란 간판이 서있기도 했다.) 힐튼 호텔은 바다위에 떠 있듯 웅장한 자태를 뿜어냈고, 그 뒤로 자리한 작지만 비싼 레스토랑들, 그리고 시작되는 노천 카페들. Viaduct가 시작되는 모퉁이에 위치하여, 주말 밤이면 광란의 장소로 변하는 그 유명한 Degree Bar부터 할리 데이비슨과 같은 무식하게 소리 크고 비싼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서있는 Wild까지… 한쪽은 카페들이, 한쪽은 요트가 둥둥 떠 있는 선착장이 있는 그 ㄱ자로 꺽어진 거리. 불과 200미터도 채 안되는 짧은 그 거리의 중간에 위치한 Soul에 성빈과 혜원은 앉아있었다. 공항에서 왜 그리 급하게 나왔는지는 이미 혜원의 차에서 설명한 터였다. 태국에서부터 시작된 그 빌어먹을 알마니 검은 정장과의 악연을 혜원은 낄낄거리며 듣고 있었다. 그 남자 혹시 변태 아니야? 라고 까지 나름 추리를 하는 혜원의 반응에 성빈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성빈이 혜원을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당시 IT 부양책을 적극으로 진행하던 말레이시아에 몇몇 프로젝트가 있어 2년 정도 체류하고, 영어 공부 겸 대학원 진학을 위해 뉴질랜드로 오자마자 길에서 혜원을 만났다. 이것 저것 묻던 성빈에게 혜원은 호감을 느꼈고, 오클랜드 대학 파이낸스를 전공하고 막 BNZ 은행에 취직한 혜원은 여러 모로 성빈을 도와주며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 2년간 머무르던 성빈은 한국으로 돌아가 이것 저것 정리를 하고 내년 초 대학원을 입학하기 위해 이제 막 들어온 것이다. “드드드드드” 혜원의 모바일이 진동했다. “하이, 제니. 예스~” 12년 전 이민을 와 중고등학교 및 대학을 모두 뉴질랜드에서 마친 혜원이 유창한 영어로 친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응~ 지금 보이프렌드랑 비아덕트에서 맥주 마셔” 라고 말하며 혜원은 성빈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혜원의 전화통화를 바라보던 성빈은 문득 싱가폴에서 산 모바일, 공항에서 떨어뜨렸던 모바일이 생각났다. 그 놈의 알마니 정장 남자 때문에 다시 전원을 켜지도 못하고 백에 구겨 넣은채 공항을 나온 것이 생각났다. 꺼내보니 역시 전원은 꺼져 있었다. 전원을 켜자 몇초 후 모바일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어서 자기를 살펴 봐 달라는 듯이 기다렸다. 어?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새 제품을 산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뭔가 세팅이 다르다. 전화 번호도 하나 저장되어 있다. 손 때도 묻어있고, 자그마한 스크래치들도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혜원이 전화를 끊고, 또 성빈에게 놀아달라고 투정을 부린다. 혜원과 대화를 하면서도 머리 한 쪽 구석에는 이상해진 모바일이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검은색 알마니 정장만 입고 다니는 Vincent의 안방은 뉴질랜드, 그 중에서도 오클랜드였다. KL에서 Tim에게 보고를 하고, 뉴질랜드에 BackUp 팀을 준비해 달라고 하고는 일단 뉴질랜드로 오늘 낮에 막 입국한 참이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자신의 팀과 검은색 Territory를 타고 오클랜드 다운타운의 힐튼 호텔에 추격을 위한 임시 본부를 마련했다. 열명 남짓의 팀원 중 절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뉴질랜드 보안정보부(NZSIS, NZ Security Intelligence Service) 소속이었다. Vincent는 이들을 ‘정보수집팀’으로 묶었다.
나머지 반은 어딘지 모르는 나라의 전쟁터에서 굴러 먹었던 용병이거나, 전투 훈련을 받은 적 있는 특수 인원들일 것이다. 어쨌든 Vincent 자신은 그들의 신상에 관해서는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명령에 충실(대부분이 살인이거나 상대방 제압, 무력화, 구속, 납치, 경호등이겠지만)하기만 하면 된다. Vincent는 그들을 ‘지원팀’이라는 완만한 표현으로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다.
NZSIS에서 가져온 GPS 추적장치부터 여러 대의 랩탑들의 Network를 세팅하고, NZSIS의 기밀 절차를 밟아 애셜론의 자료 수신 및 분석 준비까지 맞췄다. 자신이 강탈당한 (Vincent는 계속 자신이 모바일을 강탈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음이 덜 불편했다.) 모바일에는 도청 방지 장치와 특별한 GPS 장치가 있어 전세계 어디서든 켜지기만 하면 찾아낼 수 있다. 누가 가지고 있건 (분명 그 동양놈이겠지만) 켜지기만 하면 찾을 수 있다.
추격팀이 모든 장비의 세팅을 켜고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다 “어, 어, Vincent 팀장님” 하고 말을 꺼낸 건 불과 15분 전이었다. “오늘 낮에 오클랜드 공항에서 모바일이 켜졌었습니다. “ Vincent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삐- 소리와 함께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지금 Viaduct에서 모바일이 켜졌습니다.” 비아덕트라면 자신이 지금 있는 힐튼호텔에서 200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 “정보수집팀은 여기에서 계속 추적을 하며 나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해. 지원팀은 지금 나를 따라와” 하고는 나는 듯이 뛰기 시작했다.
Justin은 오클랜드 어디서나 보이는 오클랜드 타워에 붙어있는 SkyCity Hotel 에 숙소를 잡고 오후 내내 방에 있었다. 그가 여기 숙소를 잡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호텔이 제일 유명하고, 시설이 좋아보였으며, 시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MI6로 요청한 차량의 조회는 방에 짐을 풀자마다 도착했다. “이혜원, 이민 12년, 오클랜드 대학 파이낸스 졸업, 3년전부터 BNZ 은행의 Risk Management 팀에서 근무. 차량번호 BPZ722 , 모바일 번호, 집 주소, 가족 사항” Justin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었다. 차량 번호로 차주를 검색했을 것이고 이름 석자가 뜬 후에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도 쉬웠을 터였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세계 3대 정보기관이라면 영국의 MI6, 미국의 CIA, 이스라엘의 모사드 아니였던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고, 방금 죽은 사람 정도는 그 고문 실력과 집요함에 벌떡 일어난다는 KGB가 있었지만, KGB도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Justin은 오클랜드의 하늘이 좋았다. 구질구질하고 매일 비가 내리는 런던에 비하면 여긴 정말 화창한, 말 그대로 하늘이 찢어질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창 밖으로 오클랜드의 하늘에 취해 있던 Justin은 정식으로 휴가를 신청해 버릴까 하다가, 문득 그 공항에서 본 동양 커플이 생각났다. 그들은 왜 그리 도망치듯 떠났을까? 그 검은 정장의 사내와 연관이 있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도 못했던 이유일까? 빚쟁이라도 본 것일까?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이건 오버야’라고 생각하던 Justin의 주위를 끈 것은 노트북 한 쪽 귀퉁이에 떠 있는 ‘감청 메시지 도착’ 알림 아이콘이었다.
그가 재생을 하자 혜원과 제니라는 친구의 대화가 노트북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온다. 당연히 중국어나 일본어 혹은 베트남어나 한국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여자는 유창한 영어로 Viaduct 라는 곳에 있다는 애길 자랑스럽게 한다. 옆에 있던 가이드 북을 꺼내 확인하니, 그리 멀지 않다. 이 화창한 날씨에 내내 호텔 방에만 있던 Justin은 웬지 모를 호기심에 자켓을 걸치고 호텔방을 나섰다. 사실은 그 동양 커플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Viaduct가 너무 멋져 보여 커피라도 한잔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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