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말레이시아 국경 도시 핫야이 - 11월 21일 금 10:30pm
그와 모바일이 바뀐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정말 너무도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에 누구도 눈꼽만큼의 의심할 수가 없었다. 태국-말레이시아 국경을 8번째 넘는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성빈은 푸켓에서 2박 3일 동안 바닷가와 저렴한 맥주를 실컷 즐기고 이제 핫야이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넘어가 바로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이번이 8번째군” 24명만 태울 수 있는 버스의 넓직한 창가 좌석에 앉은 성빈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미 성빈은 7번이나 태국을 다녀왔다. 몇해전 말레이시아에서 2년여를 체류하며 태국을 7번이나 다녀온 것이다. 그는 태국에 넘쳐나는 가지각색의 관광객들이 좋았고, 저렴한 맥주가 좋았고, 이쁜 태국 여자들도 좋았다. (단, 이쁜 여자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증오했다.) 그 중 3번은 싱가폴-말레이시아-태국을 경유하는 저가 항공사인 Air Aisa 를 이용해서 다녀왔고, 4번은 말레이시아의 푸두라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태국 최남단 도시 핫야이, 그리고 핫야이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방콕까지 가는 육로를 이용했었다. Air Asia의 비행기가 편하고 빠르기는 하지만, 작은 사이즈의 비행기가 웬지 불안해 보였고, 무엇보다 중간 중간 쉬어가며 이것 저것 맛 볼 수 있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어 성빈은 웬만하면 육로를 이용했다. 육로로 말레이시아-태국 국경을 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그는 항상 주변에 여행객들에게 추천하고는 했다.
특히 성빈이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서는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한국에서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비무장지대에서 총에 맞거나, 운이 좋아 총을 맞지 않는다면 지뢰를 밟게 된다는 의미였다. 정말 운과 능력이 좋아 그것도 이겨내고 북위 38도에 있는 국경을 넘었다면, 월북해버린 빨갱이로 몰려 사돈의 팔촌까지 국정원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쿡. 그런 생각을 하자 성빈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내리며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역시 그에게 특이한 기분을 전해줬다. 어쨌든 이번은 그의 5번째 걸어서 국경 넘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핫야이를 떠난 버스는 출국사무소에 도착했다. 이미 10대 정도의 버스들이 심사를 받고 있었다. 이 뒤로도 버스들이 줄줄이 들어올테다. 핫야이에서 말레이시아로 출발하는 대부분의 버스는 10시에서 12시에 출발하니, 지금이 나름 러시아워인 셈이다. 더욱이 금요일 밤 아닌가.
출국사무소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버스가 출국사무소에 도착하면, 버스의 타고 있는 사람들이 우루루 내린다. 대부분의 큰 짐은 버스에 그냥 남긴채 소지품만을 소지하고 출국 수속을 밟는다. 미국처럼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되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는 법도 없다. 사람들이 내리면 버스는 저 쪽의 넓은 버스 주차장으로 가서 마약 단속을 위한 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해줄터였다. 그 사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앞에 있는 초소( 정말 그것은 초소였다. 가로 세로 1미터의 상자 안에는 출국사무소 직원이 그 날의 날짜가 적힌 도장을 하나 가지고 있으며, 머리 하나도 안 들어갈만한 창문이 있는) 에 여권을 밀어 넣으며 Hi 를 한번 날려주면, 출국 도장을 쾅! 찍어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옆에 단층으로 된 사무실이 있지만, 여기서 마약소지나 불법체류로 체포되지 않는다면 저 건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버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도장을 받으면 잘 확인해야 한다. 가끔 나이 많은 직원들이 날짜를 오늘로 맞추지 않아 어제 , 때로는 한달전 날짜가 찍히기도 했다. 성빈도 두번째 출국 때 당해보았다. 그래서 날짜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곧 버스는 왔고, 24명의 사람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5분쯤 가자 , 이번에는 말레이시아 입국 사무소가 나왔다. 데자뷰였다. 태국 출국사무소와 비슷한 크기의 넓이에 , 똑같이 버스 주차장이 있고, 똑같이 4개의 초소! , 그리고 똑같이 책상이 5개쯤 들어있는 단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태국에서는 히브리어나 아랍어와 비슷한 태국말 대신 한국의 초등학생이 보면 깔깔대고 웃을법한 말레이시아식 영어가 써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KOPI(coffee) 같은 ... 4개의 초소 중 한 초소는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여기서의 외국인은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의미다, 국적 따위야 아무려면 어떠랴)이 줄을 서게끔 되어 있고, 나머지 3개의 초소에는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기타 등등, 백인도 아니고, 동양인도 아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어차피 육로로 국경을 넘는건 극소수의 돈 있는 배낭여행객과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니. 성빈은 이것이 불평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저 쪽 초소의 긴 줄에 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성빈이 외국인을 위한 초소로 가자 앞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급 세무인지, 비단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 아무튼 고급스럽기 그지 없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막 여권을 초소에 밀어 넣고 있었다. 186 정도의 키에, 눈이 부실 정도로 짧지만 밝은 금발, 떡 벌어진 어깨. 분명 북유럽 사내일거라고 성빈은 생각했다. 짐이라고는 007 가방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만, 버스 안에 얼마나 짐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을터. 곧 그 남자는 여권을 받아들고, 성빈 차례였다. 나이가 90살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성빈을 흘긋 보더니 이내 도장을 찍었다. 나이가 저렇게 많아 보이지만, 고생때문이라고 성빈은 생각했다. 아마 마흔 중반일 것이다.
습관처럼 여권의 날짜를 확인한 성빈은 순간 짜증이 났다. 21 Nov 라고 찍혀있어야 할 곳에는 21 May 라는 도장이 버젓이 찍혀 있었다. 아~ 저 할아버지. 내일이면 말레이시아를 출국해야 하는데. 다음 사람을 제치고 초소의 머리통 하나도 안 들어갈 창문에 얼굴을 쑤셔 박고는 여권의 날짜가 잘못됐다고 하니 저 옆의 건물로 가서 말하란다. 결국 저 책상 5개의 건물에 들어가 보는군. 건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바로 앞에서 도장을 받은 금발의 남자가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날짜 확인을 안 했나 보다. 성빈은 자비심을 베풀어 그에게 걸어가서 이야기를 했다. 여권에 날짜가 잘못 찍혔다. 나중에 구찮은 일이 생길수도 있으니, 해결하는 게 좋다. 나도 내일 출국을 해야 해서 지금 사무실로 가서 도장을 다시 받을거다. 같이 가서 해결하자. 남자는 그 비싸보이는 검은색 정장의 안 주머니에서 여권을 보고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말없이 성빈과 함께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5개의 책상 중에 사람이 앉을 수 있어 보이는 책상은 2개였고, 성빈과 그 남자는 그 책상에 앉았다.
찌는 듯이 더운 말레이시아의 날씨는 전혀 새롭지 않거만 그 사무실 안은 더욱 더 더웠다. 남자는 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성빈은 얼핏 보았다. 목 부분에 있는 Armani 마크를. 분명 비쌀 터였다. 웃옷을 벗느라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모바일을 꺼내 책상에 올렸다. 그와 동시 성빈도 시간을 확인하느라 자신의 모바일 SAMSUNG i780 모바일을 꺼내 책상에 놓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이지만, 말레이시아/태국/뉴질랜드 등 GSM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지난주 태국에 가기 전, 싱가포르에서 구매한 것이다. 알마니 정장 남자는 성빈쪽으로 책상 끝자락에 모바일을 놓았고, 성빈은 알마니 정장 남자쪽으로 책상 끝에 모바일을 놓았다. 사실 둘 모두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책 상위의 산더미 같은 서류들 때문에 공간이 거기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똑 같은 모바일이 10cm 거리에 있었다. 먼저 도장을 고쳐 받은 알마니 남자가 일어섰다. 오른손으로는 가방을 잡으며 왼손으로는 모바일을 잡는 순간이었다. 성빈의 도장을 고쳐주기 위해 이쪽으로 오던 남자가 책상에 있는 서류를 몸으로 밀자, 수 많은 서류들이 밀렸고, 그 덕에 성빈의 모바일이 그 남자의 모바일 위치까지 밀려가는 순간 가방쪽을 바라보던 남자는 자연스레 성빈의 모바일을 잡고 말았다. 그 남자의 자신이 바라본 위치에서 모바일을 잡아서인지 전혀 의구심 없이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 자신을 기다리는 버스로 갔다. 곧 도장을 고쳐 받은 성빈도 하나 남은 모바일을 들고는 나가 곧 버스에 올랐다. 이제 버스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KL(쿠알라 룸푸르)까지 달릴 것이다. 밤 11시가 넘었다. 자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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