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상상력을위하여] 아이들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길 / 도정일
세 살 꼬맹이를 컴퓨터 앞에 앉히고
고3까지 하루 24시간 ‘과잉조직’의 삶으로 내몰고
아이들에게도 ‘속도의 포로’이길 강요하고
반교육을 교육, 정신적 위축을 성장이라고 부르니…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불균등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의 하나가 성장속도다. 인간은 느리게 자라는 동물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걷기까지 적어도 1년, 똥오줌을 가리는 데는 2년이 걸리고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가릴 줄 알기까지는 4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 세 살배기들에게 “네가 알아서 먹어”라고 음식 선택을 맡기면 녀석들은 달싹한 아이스크림만 먹다가 두 달 만에 죽든가 병원으로 실려 가야 한다. 게다가, ‘철들기’에 이르면 일은 더 난감하다. 인간 동물이 좀 철이 들어 ‘사람’ 소리를 듣자면 얼마나 많은 철이 흘러야 할까? 밥 딜란의 노래 “바람 속에 불려온다네”에 나오는 표현을 빌면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인간이라 불러줄까” “얼마나 많이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그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다.
 
신이 인간을 왜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지는 하늘로 그를 방문해서 한 차례 되게 따져볼 문제다. 무엇보다도 시간 낭비와 경제적 비효율이 심각하다. 걷는 데 왜 1년씩 걸려야 하며 엎어지지 않고 뛰는 데 왜 7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가. 말을 배우고 가갸거겨 익히고 구구단 외고 책 읽는 데 왜 10년씩 걸리고 대학이란 델 들어가기까지 왜 18년이 걸려야 하는가. 모두 멋도 모르고 자라긴 했지만 돌이켜보건대 분통 터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듯싶다. 그 시간에 일하고 돈 벌었다면 우리 모두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 게 아닌가. 신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인간을 설계했더라면 우리 어릴 적 동무 곰배는 뛰다가 자빠져 팔 부러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우리 동네 말숙이는 압력밥솥 같은 학교에 가기 싫어 자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 키우고 학교 보내느라 부모들이 허리 휘게 벌어야 하는 돈은 또 얼마인가. 그럴 돈으로 아파트 사고 땅 산다면 세상에 가난뱅이가 어디 있겠는가.
 
두뇌 연구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생후 1년 동안 아기의 뇌가 도달하는 성숙도는 40%에 불과하다. 그 뇌가 95%의 성숙 수준에 이르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인간은 머리통 큰 동물로 태어나지만 그 머리통이 다 영글자면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 침팬지의 경우는 생후 1년 안에 뇌의 70%가 성숙하고 2년 안에 성장이 완성된다. 침팬지 머리통이 2년이면 끝내는 일을 인간의 뇌는 10년 넘게 하고 있어야 한다. 이건 무슨 얘기냐면, 아이들이 열 살이 되어야 뇌의 인지적 능력이 95% 선에 이르고 나머지 5%는 열 살 이후에 발달한다는 소리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면, 여덟 살 혹은 10살까지는 소위 ‘지능지수’(IQ)라는 것이 결정되지 않고 말랑한 상태로 남아 환경의 영향에 민감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생후 10년은 인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다. 개체의 능력발달을 자극하고 돕기 위한 사회적 개입을 ‘교육’이랄 때, 그 교육이 최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생후 10년이다.
 
교육과 소득수준의 관계,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 등을 열심히 연구해온 시카고대학 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은 인간 성장에 아주 중요한 시기를 ‘15세까지’로 잡는다.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배제했을 때, 한 인간의 지적 정서적 능력이 거의 결정되는 나이가 15세 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은 ‘교육의 효과’ 부분이다. 15세 이후에는 교육 등의 외적 개입이 개체의 기본적 능력 형성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고 그는 말한다. 15세 이후의 교육은 한 인간의 기술적 능력 계발은 돕지만 그의 근본적인 능력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헤크먼은 2000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15세까지의 연령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가 ‘8세까지’라는 주장이다. 생물학적 요인 아닌 외적 요인이 아이들의 지능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 8세까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취학 이전’의 시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취학 이전이라면 공교육이 시작되기 전의 다섯 살, 여섯 살까지의 시기다.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가? 헤크먼의 권고는 뜻밖에도 “책 읽어주고 이야기 들려주라”는 것이다. 이 시기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즐겁고 자유로운 부모-자녀 사이의 소통활동이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작가, 시인, 인문학자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소리, 그러나 경영과 시장과 기술 제일주의의 시대에 사람들이 좀체 귀담아 듣고자 하지 않는 소리를 경제학자 헤크먼이 하고 있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탁월한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생 밀감이 아니다. 신의 설계이건 자연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느림, 자유, 여유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은 동일한 속도를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시각능력이 채 안정되지도 않은 세 살짜리 꼬맹이들을 컴퓨터 앞에 앉혀 하루라도 빨리 ‘아이티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다. 초등 1년생에서 고3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하루 24시간 꽉 짜여진 ‘과잉조직’의 삶 속으로 내몰린다. 그들은 숨통이 막혀 있다. 무지하고 철딱서니 없는 어른들은 이런 양육법이 아이들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보는 일이 없다. 그들은 가장 반교육적인 것을 교육이라 부르고 정신의 기형적 위축을 성장이라 부른다.

얼마나 많이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인간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늘에서 하늘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의 하나다. 그러나 그 능력을 발휘하자면 성장기의 정신의 확장이 필요하다. 딜란의 노래는 계속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내야/ 그는 남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죽음들이 있어야 할까?” 이런 물음들 끝에 딜란의 노래는 후렴구로 대답한다. “친구여, 그 해답은 바람 속에 불려온다네, 바람 속에 불려온다네.” 남들의 울음소리를 듣자면 인간에게는 연민과 겸손을 확장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능력을 키우는 비밀은 성장기의 아이들을 자유롭게 숨 쉬며 자랄 수 있게 하는 바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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