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강진유배시절에 쓴 작품으로 수령이 임명을 받고 임지에 가서 사무를 처리하기까지 명심해야 할 일을 적은 한자와 우리말 해설등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


목차

1. 부임육조
2. 율기육조
3. 봉공육조
4. 애민육조
5. 이전육조
6. 호전육조
7. 예전육조
8. 병전육조
9. 형전육조
10. 공전육조
11. 진황육조
12. 해관육조



정약용

(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2]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3]가 있다.


성장과 공직 생활

1762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윤선도의 외손녀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일곱 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내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 맏형수 경주 이씨와 서모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에 승지 흥화보(興和輔)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4남 2녀를 잃었다[7].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결혼하던 해에 부친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6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1789년(정조 13)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시 해미면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31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1800년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 임금이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박해를 받았는데,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른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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